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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20) 사목 중심지, 도앙골·동골·절골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17-02-02 16:44:55 | 조회 : 469

가톨릭평화신문 2017. 01. 15발행 [1398호]


[다시 보는 최양업 신부] (20)

사목 중심지, 도앙골·동골·절골


열심한 신자들 옹기종기 모여사는 충청도 교우촌을 거점으로



▲ 최양업 신부가 귀국후 6개월간 사목 여행을 마치고 한달간 머물면서 1850년 10월 1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썼던 도앙골 교우촌터. 돌제대와 최양업 신부 시성 기원비가 조성돼 있다.




최양업 신부의 초기 주요 사목지는 충남 부여 도앙골과 충북 진천 동골, 절골이었다.

1849년 12월 하순에 귀국한 최 신부는 6개월 동안 충청ㆍ전라ㆍ경상ㆍ경기ㆍ강원 전국 5개 도를 돌면서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최양업 신부가 사목할 교우촌은 5개 도내 127개소로 전체 교우촌(1850년 말 185개소)의 약 70%에 달했다. 최 신부는 1850년 1월부터 6월까지 약 2만㎞를 걸으며 교우촌을 방문했다. 그리고 1850년 7월 한 달 동안 충남 부여 도앙골(부여군 내산면 금지리 249)에 머물렀다. 최 신부는 1850년 10월 1일 이곳에서 귀국 후 처음으로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긴 편지를 썼다. 이러한 사실로 도앙골이 1850년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 중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봄에 복사꽃이 골짜기 양편으로 만발해서 도화골이라고도 불렀던 도앙골은 삽티, 내대, 서짓골, 거칠 등 여러 교우촌과 인접해 있고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최 신부는 이러한 지리적 환경과 이곳 신자들의 열심한 삶의 모습에 감화돼 도앙골을 사목 거점으로 삼지 않았나 추정한다. 최 신부는 도앙골에서 쓴 편지에서 이곳 신자임을 직접 밝히지 않았지만 “산속에 사는 신자들은 거의 다 교리에도 밝고 천주교 법규도 열심으로 잘 지키고 사는 열심한 신자”라고 했다. 이들 가운데 오요한, 김사범, 김루카, 김바오로, 오시몬 등 5명이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

최 신부는 도앙골에서 1850년 10월 1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쓴 다음 1850년 후반기부터 1851년 전반기까지 사목 여행을 떠났다. 최 신부는 약 8개월에 걸친 긴 여정 동안 한 차례 체포될 고비를 넘겼다. 최 신부는 이 기간 3620명에게 고해성사를, 2753명에게 성체성사를 거행했다. 또 어른 197명과 유아 54명에게 세례성사를, 죽을 위험에 처한 비신자 아기 255명에게 대세를 줬다. 최 신부는 장마가 시작되는 7월에서야 사목 여행을 마무리하고 절골에서 고단한 짐을 겨우 내려놓았다.

절골은 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편지를 쓴 곳이다. 이처럼 절골은 1851년 최양업 신부의 여름 휴가지이자 사목 중심지이다. 절골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다만 충북 진천 백곡면 배티의 한 교우촌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백곡면 일대 절골이라 불리는 장소는 배티뿐 아니라 여러 곳이 있다. 명암리 양담마을, 배티 인근 용덕리 용진 마을, 백곡면 사송리와 양백리에도 절골이 있다.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 박사는 용덕리 용진 마을 절골을 최 신부의 사목 중심지로 본다. 용덕리 절골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1.3㎞ 지점에 느릅실 동골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주대 역사문화컨텐츠학과 서종태 교수는 백곡면 양백리 절골을 최양업 신부가 머문 절골이라고 주장한다. 이곳이 배티에서 가장 가깝고 또 용덕리 절골보다 더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에 분류 보관돼 있던 최양업 신부의 편지는 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쓴 편지 이후로 1854년 11월 4일 동골에서 쓴 편지까지 약 2년간 공백이 있다. 1853년 10월 23일 마카오의 스승 신부에게 보낸 편지가 있지만, 이 편지는 바우링(1792~1872) 주중 영국 공사 겸 홍콩 총독이 외무장관 클라렌든에게 보낸 1854년 8월 25일 편지에 들어있는 발췌본이다. 이 편지는 1989년 10월 명지대 박태근 교수가 영국 외교문서에서 발견한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귀국 후부터 1860년 선종 때까지 해마다 사목 보고 형태의 편지를 파리외방전교회 스승 신부들에게 보냈다. 따라서 1852년과 1853년 편지는 유실된 듯하다. 그 증거로 최양업 신부가 1854년 11월 4일 리브와 신부에게 편지에서 “1854년 3월 조선에 입국했다가 3개월 만에 뇌염에 걸려 선종한 장수(Jansou) 신부와 그 밖의 소식에 대해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를 읽으라”고 한 것으로 보아 최 신부는 정기적으로 파리외방전교회에 사목 보고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

1954년 11월 4일 리브와 신부에게 쓴 편지는 동골에서 작성됐다. 1852년부터 1854년까지 조선 교회에선 많은 변화가 있었다. 메스트르 신부가 1852년 8월 입국했다. 건강을 회복한 다블뤼 신부도 1853년 후반부터 교우촌을 사목했다.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1853년 2월 숙환으로, 1854년 입국한 장수 신부도 얼마 안 돼 뇌염으로 선종했다. 그해 8월에는 베르뇌 주교가 제4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됐다.

동골 역시 오늘날 충북 진천군 백곡면에 있다는 것은 일찍부터 알려졌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학자들 간의 의견이 나뉜다. 현재까지 가장 유력지로 인정받고 있는 곳은 ‘문봉리 동골’이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의 셋째 동생 최우정이 살았던 백곡면 양백리 동골, 산골 깊숙한 곳에 터한 연백리 동골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글·사진=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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