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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순교자들] ②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17-04-07 09:46:14 | 조회 : 532

가톨릭평화신문 2017. 04. 09발행 [1409호]



[평양의 순교자들] ②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



일제와 공산당 탄압에도 목자 소임 다하다 순교




‘시련기를 살다간’ 사제였다. 사제품을 받은 시기도, 주교로 임명돼 주교품을 받은 시기도, 해방 이후 주교로 살았던 시기도 시련과 박해와 순교로 점철했다. 그러나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시련을 극복하며 지극한 사랑으로 신앙의 모범을 드러냈고 순교의 화관을 썼다.


홍 주교는 1906년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면 감6리(현 평남 평원군 화진리) 태생이다. 국운이 기울던 대한제국 시대에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고, 어머니도 보통학교 5학년 때 잃었다. 이웃 동네로 시집간 누이 홍 마리아와 자형 최남현(다니엘)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홍 주교의 본적지가 누이의 주소(한천면 감7리 327)로 돼 있는 것도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시사한다.

그런데 누이도 몹시 빈곤했다. 홍 주교는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일찍부터 자립했다. 15세 어린 나이에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사제 성소를 꿈꿨다. 신학생 시절의 홍 주교는 ‘책벌레’로 소문났다. 쉬는 시간조차도 책을 읽는 데 열중했고, 영어를 독학하는 데 몰두했다. 당시 신학교에선 라틴어와 프랑스어 외에 다른 외국어 학습을 못 하게 했는데도 혼자서 영어를 익혔고, 이 같은 선견지명은 훗날 메리놀외방선교회가 평안도 선교를 맡게 되면서 빛난다.

어렵게 신학교 과정을 마친 그는 1933년 5월 25일 평양 관후리주교좌성당에서 서울대목구장 아드리앙 조제프 라리보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는다. 양기섭, 강영걸 신부에 이어 평양교구 사상 세 번째 본토인(本土人) 사제였다.

▲ 1940년 평양대목구 순천본당 주임으로 재임하던 시절 홍용호 신부가 할머니 신자와 만나 인사를 나눈다. 이를 바라보던 한 아이(가운데)가 인사 장면을 그대로 흉내내자 신자들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 1933년 5월, 홍용호 신부가 자신의 출신 본당인 평양대목구 마산성당에서 주례한 첫 미사.



평신도 중심의 전교 운동 활성화

관후리본당 보좌로 사목을 시작한 홍 신부는 1934년 1월 평양교구에서 월간 「가톨릭 연구」를 창간해 초대 사장을 맡았고, 교리 강좌와 함께 성경과 교회사, 전례 해설 등을 통해 신자들의 신심 생활에 도움을 줬다. 아울러 1934년 ‘평양지목구 가톨릭운동연맹’이 조직되면서 의장에 임명돼 평신도 중심의 전교 운동을 활성화했다. 1936년 3월 지목구장 비서로 서포교구청에 있다가 1936년 8∼12월 영유본당 주임으로 가면서 ‘소년단’을 조직했다. 1937년 1월에는 지목구 출판사를 전담하게 되면서 「가톨릭 연구」를 「가톨릭 조선」으로 개칭한 뒤 사장 겸 주필로서 문서 선교에 앞장섰다. ‘평양교구 봉헌문’을 지어 교구 신자들이 한마음이 돼 기도하도록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1938년 12월 일제가 우리 말과 글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면서 「가톨릭 조선」은 폐간됐다.

어려움 속에서도 1939년 7월 11일 평양지목구가 평양대목구로 승격되는 기쁨을 맛봤지만, 이 기쁨도 잠시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미국 메리놀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이 전원 감금되면서 홍 신부 또한 순천경찰서에 잡혀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42년 2월 평양대목구장 윌리엄 오세아 주교 역시 연금된 상태여서 서울대목구장 노기남 주교가 교구장 서리를 맡았지만, 노 주교 혼자서 서울과 평안도 전역을 관할하기 어려웠다. 노 주교는 석방된 홍 신부에게 평양대목구장 서리 직무대행을 맡겼다. 홍 신부는 대목구 공동체의 자립정신 함양과 함께 성직자 양성의 중요성, 신심 강화 등에 역점을 두고 사목했다. 이어 1943년 3월 9일 제6대 평양대목구장에 임명돼 3월 21일 대목구장으로 착좌했다.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1944년 2월 일제에 관후리성당과 대지, 부속건물을 징발당했고, 성당을 허문 자리에는 고사포 부대가 들어섰다. 1944년 4월 주교로 임명됐지만, 그해 6월의 주교 서품 미사는 일제가 관후리성당 대신 내준 개신교 예배당 산정현교회에서 봉헌해야 했다.



박해와 순교의 길을 걷다

해방 이후 평양대목구의 5년은 ‘박해와 순교’로 얼룩졌다. 일제에 빼앗겼던 관후리주교좌성당 부지를 되찾아 새로이 대성당을 건축했고, 1947년 9월 1일 정초식을 거행하며 홍 주교가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께 바치는 봉헌문’을 지어 낭독까지 했다. 하지만 공산 정권의 노골적 박해는 계속됐다. 평양시 인민위원회는 1948년 12월 28일 관후리성당 건물을 이듬해 1월 3일까지 정부에 양도하라고 통고했고, 결국은 1949년 12월 몰수해 갔다.

운명의 날은 1949년 5월 14일이다. 이에 앞서 5월 7일 함흥대목구장 겸 덕원자치수도원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의 요청으로 덕원에 갔던 홍 주교는 사우어 주교아빠스로부터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체포되면 자신의 교구를 보살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5월 9일 사우어 주교아빠스가 체포됐고, 홍 주교마저도 5월 14일 서포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첫 종신 서원자 면담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오던 중 체포되면서 행방불명됐다.

그 뒤 부감목(현 총대리) 김필현 신부가 백방으로 알아본 바에 따르면, 홍 주교는 평양인민교화소 특별 정치범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당시 홍 주교와 같이 끌려간 두 소년과 함께 같은 감방에 갇혀 있다 풀려난 김원우(아명 김인국)씨의 증언도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한다.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을 지내고 1959년 소련으로 돌아간 박길룡 박사의 증언으로는 홍 주교는 평양 수복 직전인 1950년 10월 18일 같은 감옥에 수감돼 있던 조만식(1883∼1950) 선생 등과 함께 북한 내무성 정보처 한규만 소좌 등에 의해 총살됐다. 홍 주교의 나이 44세였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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