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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순교자들] ④ 강창희 야고보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17-04-21 10:00:09 | 조회 : 791

가톨릭평화신문 2017. 04. 23발행 [1411호]


 
[평양의 순교자들] 공산당에 맞서 교회 지키던 청년, 총탄 맞아 순교


④ 강창희 야고보



공산 치하 평양교구의 첫 순교자는 강창희(야고보)다.

관서 교회 교우촌 가운데서 가장 오랜 섶가지 교우촌에서 자라나, 교회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안위도 살피지 않고 헌신한 평신도였다. 깊은 신심과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교구 행정사무 전반을 처리해 성직자들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특히 제4대 평양대목구장 윌리엄 오세아(William O’Shea) 주교의 신임이 깊었다. 죽음을 불사하는 열정과 애정이 강창희 순교자의 삶을 관통했다.
 


▲ 1937년 9월 26일 평양대목구 가톨릭운동연맹이 주최한 제3회 교리경시대회에서 우승한 관후리본당 신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맨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강창희 당시 평양지목구 재단 사무 담당자다.


1936년 2월 5일에서 8일까지 열린 소년 소녀 수양회를 마치며 기념 촬영을 하는 서포본당 신자들.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성직자와 평신도 중 왼쪽이 강창희다.




강창희 순교자는 1912년 9월 평안남도 평원군 검산면 신지리(현재의 숙천군 검흥리)에서 태어났다.

잎이 많이 붙은 땔나무나 잡목 잔가지를 뜻하는 섶나무가 많은 산 아랫마을이라는 뜻의 섶가지(薪枝里) 교우촌 출신이었다.

섶가지 교우촌에 공소가 설립된 건 1896년의 일인데, 이 교우촌을 중심으로 훗날 영유ㆍ숙천ㆍ순천ㆍ성천ㆍ의주ㆍ안주 본당 등 6개 본당의 모체가 된 섶가지본당이 1898년에 설립됐다. 관서에서는 첫본당 평양(훗날 관후리 주교좌)본당에 이은 두 번째 본당이다. 섶가지공소의 초대 회장이 강용기(베드로)였고, 그의 증손자가 바로 강창희였다. 그의 아버지는 경성의학전문학교 1회 졸업생인 강문홍으로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병사했다.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1남 1녀 중 장남이었던 그는 섶가지공소에서 1908년 설립한 성숙(聖肅)학교에서 초등과정을 이수하고, 평원군 영유 읍내에 있던 사숙(私塾) 명륜당에서 중등과정을 공부했다. 이후 일본 혼슈 중부 아이치 현 나고야 시에 있는 도카이(東海) 상업학교에 진학했으나 3학년 때 중퇴하고 1933년 귀국했다. 고향에 있던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였다. 1934년에 순경 채용 시험에 응시해 합격한 뒤 1년간 중화 지방에서 순경으로 살았다.

증조부부터 신앙의 뿌리를 내린 집안이었기에 교회 일이 우선이었다. 1936년에 평양교구가 발행하던 월간 ‘가톨릭 연구’(훗날의 ‘가톨릭 조선’)가 한국 가톨릭운동의 유일한 기관지로 승격된 것이 계기였다. ‘가톨릭 연구’ 제작으로 교구 출판사 업무량이 늘어나자 출판과 교구재단 업무를 겸직했던 김구정(이냐시오)이 출판만 전담하게 됐고, 강창희는 교구 재단 업무를 맡게 됐다.


침착하고 강단있어 교구 업무 수행 능력 탁월

유도 유단자였던 그의 성품은 침착하고 담력이 컸으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일을 맡으면 책임감 있게 처리했고, 붙임성이 좋아 동료들과 잘 어울렸다. 1942년 6월 메리놀외방선교회 성직자들이 강제 추방될 때, 그의 성품과 재능이 특히 빛났다. 당시 대목구장이던 오세아 주교와 순천본당 주임이던 홍용호 신부 사이에 이뤄진 교구 사무 인계인수를 극비리에 잘 처리했고, 이로써 ‘선교지역 교회’에서 ‘자립 교회’로 강제로 옮겨가는 전환기를 순탄하게 넘길 수 있었다.

해방 이후 평양교구의 첫 과제는 1944년 2월 일본군에게 징발돼 고사포부대 진지로 사용됐던 관후리 주교좌성당 부지를 되찾는 일이었다. 6대 평양대목구장 홍용호 주교는 이에 부감목(현 총대리) 김필현 신부를 책임자로, 강창희를 보조자로 임명, 헐린 주교좌성당 부지를 되찾고자 했다.

김 신부와 강창희는 우선 평양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한근조를 찾아가 교회에 성당 부지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한 위원장은 2∼3주 뒤 그 땅이 평양의 중심지여서 도시 미화 차원에서 공원으로 조성해야 하기에 돌려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평양대목구는 소련군사령부 도시계획 담당 장교의 자문과 협조를 받아 다시 시 인민위원회에 반환 안건을 상정시키고, 홍 주교는 평안남도 정치인민위원회 위원장이던 조만식 선생을 찾아가 교회가 그 땅을 찾을 권리가 있다는 점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1945년 10월, 마침내 한 달 보름을 끌어오던 성당 부지 반환 문제를 매듭짓기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교회 측 대표로 김 신부와 강창희가, 평양시 인민위원회 대표로 한근조가, 소련군 사령부 장교와 조만식 선생이 중재자로 참석해 평남 인민위원회 위원장실에서 회합을 했고, 이 회합에서 성당 대지가 교회 소유로 돌아가는 데 원만한 합의를 봤다.

강창희는 이날 밤을 새워 성당 부지 인수 서류를 작성, 이튿날 시 인민위원회에 제출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주교관에 도착한 서류에는 성당 대지를 평양시에서 ‘일시적으로 대여한다’고 기록돼 있었다. 이에 강창희는 그날로 그 문서와 홍 주교의 성명서 한 통을 갖고 시 인민위원회로 들어가 교회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그들과 맞섰다. 평신도 대표로서 그는 공산당원들에게 교회 입장을 알리고 설득하고, 문제의 부지를 교회에 되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랬기에 그의 재능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위협으로 다가왔고, 그들을 자극했다.

늦게까지 시 인민위원회에서 성당 부지 반환 문제를 두고 맞서던 그는 친구 김현준(요한)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주교관 근처의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옛 숭실전문학교 담을 끼고 가던 중 양촌 남쪽 대리석 가공소 근처에서 3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평양교구의 첫 순교자였고, 그의 나이 33세였다.

그의 죽음에 성직자와 평신도 슬픔에 잠겨

다음 날 이른 새벽, 이 소식을 접한 조문국 부제는 윤공희(훗날 광주대교구장) 부제, 지학순(훗날 원주교구장) 신학생 등과 함께 강창희의 집에 가서 그가 지난밤에 집에 돌아오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곧바로 보안서원이 알려준 현장으로 달려가 시신을 수습했다. 가마니에 덮인 그의 시신 오른쪽 옆 가슴에 총탄이 관통했으며, 그 총탄은 다시 왼쪽 팔을 맞춰 팔이 부러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누가 그를 살해했는지는 결국 밝혀내지 못했다.

이 소식을 접한 홍 주교는 물론 교구 사제단과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공산 치하에서 자행된 첫 순교에 다 함께 슬퍼하며 애도했다. 그의 장례에는 홍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 개신교 신자들, 일반인들까지 함께했으며, 그의 유해는 서포 평양대목구 묘역에 안장됐다.

공산 치하 북한 교회의 첫 순교자가 된 강창희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관후리성당 대지는 마침내 교회로 돌아왔고, 그의 순교는 전 평양대목구 공동체가 일치해 주교좌 대성당 신축 사업을 맨주먹으로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강창희의 유족 중 부인은 월남하지 못했고, 자녀 1남 1녀 중 딸은 전쟁 중 부산으로 피란, 혼인해 살다가 사망했다. 월남했던 외아들 강용선(1931∼?)은 10ㆍ20 평양수복 때 어머니를 만나러 평양으로 갔다가 다시 내려오지 못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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