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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박물관 특별전 지상중계 (3) 보편교회 일원이 된 자생적 교회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17-08-31 10:58:17 | 조회 : 2451

가톨릭신문 2017-08-27 [제3059호]



바티칸박물관 특별전 지상중계(3)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한국 천주교회 230년 그리고 서울’



보편교회 일원이 된 자생적 교회
 박해 이겨내고 신앙의 자유 얻다



학문에서 시작해 신앙으로 뿌리내린 ‘자생교회’.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역사다.

선교사나 사제도 없이 평신도에 의해 태어난 이 땅의 교회는 보편교회와 관계를 맺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특히 조선교회의 신자들은 긴 박해를 겪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보편교회에 선교사와 사제 파견을 요청했다. 이 결과,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소칙서를 발표해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으로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다. 자생적으로 탄생한 교회가 보편교회의 일원이 된 것이다.

바티칸박물관 특별전 제5막에서는 조선과 교황청 사이에 왕래한 서한들을 볼 수 있다. 김대건·최양업 신부 관련 유물과 영상도 함께 전시된다. 이어 6막에서는 조선의 개항으로 점차 신앙의 자유가 용인되는 과정을 따라가 볼 수 있다.


성 김대건 신부

월전 장우성 화백이 그린 첫 한국인 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초상. 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 5막 : 바티칸과 조선교회

1784년, 선교사나 사제도 없이 조선 땅에 신앙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성사의 완전한 은총을 바라던 신자들은 중국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사제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조선 신자들의 간절함을 전할 수 있었던 방법은 오로지 편지뿐이었다. 당시 한양에서 북경까지 한 번 오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6개월이었다. 북경교구에 편지를 전하면 그 편지는 다시 로마 교황청에 전달됐다. 답장을 받기까지는 족히 1, 2년의 시간이 걸렸다. 신앙생활을 위해 사제를 요청했던 간절함이 담긴 이 편지들은 초기 한국교회 신자 공동체가 보여준 믿음에 대한 열망이었다.

5막에서는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장관에게,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됐다는 소식을 알리는 서한이 전시된다. 1811년에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교황 비오 7세에게 보낸 서한과 유진길 아우구스티노가 북경 교회에 쓴 서한 등, 인류복음화성 문서고에 소장 중인 귀한 편지들도 대중들 앞에 펼쳐진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조선대목구 설립 소칙서와 조선대목구장 임명 소칙서를 통해 조선교회가 보편교회의 일원이 됐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5막에서는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한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1836년 말 신학생으로 선발된 세 명의 소년들이 조선을 떠났고, 이 중 1845년 김대건이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최초의 한국인 사제였다. 4년 뒤 최양업이 사제품을 받고 돌아와 12년간 전국을 다니며 3700여 명에게 세례를 줬다. 특별전에서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초상과 최양업 신부의 서한도 선보인다.



조선대목구 설정 소칙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1831년 9월 9일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반포한 두 개의 소칙서.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북경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대목구장을 임명한다고 선언하고 있다.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조선대목구장 임명 소칙서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1831년 9월 9일 로마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반포한 두 개의 소칙서.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북경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대목구장을 임명한다고 선언하고 있다.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소장


■ 6막 : 신앙의 자유를 얻다

세계의 변화에 굳게 문을 걸어 잠갔던 조선은 제국주의의 물결 속에서 문호를 열었다.

1876년 개항으로 조선은 새로운 국제질서에 편입됐다. 이로써 100여 년 동안 지속되던 천주교 박해는 잦아들었다. 1886년 체결된 한불조약으로 선교사들의 거주와 활동이 보장됐고, 부분적이나마 선교활동도 허용됐다.

1895년 조선의 8대 교구장이었던 뮈텔 대주교(당시는 주교)는 경복궁에서 고종을 만났다. 고종은 지난 시기 천주교에 가했던 박해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했다. 조선 왕실과 천주교가 100년 만에 화해했다는 것을 한눈에 보여주는 자리였다. 이 만남으로 조선이 천주교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표됐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한국교회는 성당 건립 등 교회 발전에 힘썼다. 1898년엔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던 명례방에 한국 최초의 주교좌성당을 건립했다. 바로 주교좌 명동대성당이었다. 성당 건립은 100년 만에 얻은 자유의 상징이었다. 비밀리에 실천했던 신앙생활이 비로소 공식적인 장소에서 이뤄지게 됐고, 목숨으로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시작했다.

6막에서는 사실상 조선 땅에 신앙의 자유를 가져온 「조불수호통상조약문」을 비롯해 뮈텔 주교에게 보낸 고종의 친서, 부이수(Bouyssou) 신부의 호조 등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갖게 된 이후 한국사회 안에서 펼쳐진 교회의 활동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지 매입 일지’와 ‘건물 배치도’ 등을 통해 명동대성당 건립 과정도 확인할 수 있다.



뮈텔 대주교에게 보낸 고종의 친서
1909년 5월 고종이 뮈텔 대주교(당시 주교)에게 보낸 편지. 고종의 옥새가 찍힌 편지로 뮈텔 대주교의 안부를 묻는 등 애틋함이 묻어 있다. 고종은 외국 여러 나라와 맺은 조약 문서를 뮈텔 대주교에게 맡겼다. 고종은 이를 통해 총독부의 감시를 피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하는 등 독자적 외교권을 행사하려고 했다.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뮈텔 대주교에게 보낸 고종의 친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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