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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8- 옥천희 요한, 황사영 알렉시오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19-05-23 16:59:58 | 조회 : 399

가톨릭평화신문 2019.05.26 발행 [1516호]


‘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8


 옥천희 요한·황사영 알렉시오



▨옥천희(요한, 1767~1801)

옥천희는 평안도 선천에서 옥윤기와 안조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했던 그는 1794년부터 북경을 왕래하는 사신 일행의 마부로 생활했다. 그러던 중 1798년 초 귀국하던 길에 황심(토마스)를 만나게 됐으며 이후 선천에서 약국을 운영하기도 했다.

옥천희는 1799년 겨울 황심을 다시 만나 그와 함께 북경으로 가서 남당의 구베아 주교를 방문했다. 이때 그는 구베아 주교에게 요한이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1800년 초 귀국한 그는 황심과 함께 서울 남대문 안에 있는 현계흠(플로로)의 약국에서 황사영을 만났고, 이어 강완숙(골룸바) 회장 집에서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나 교회 밀사 역할을 하게 됐다.

그는 1800년 겨울 황심의 편지를 갖고 다시 북경으로 가서 구베아 주교를 만났으며, 주교로부터 「교요서론」을 받아 공부했다. 1801년 초 사신 행차를 따라 귀국 길에 오른 그는 3월 의주에 도착해 신유박해 소식을 듣게 됐다. 그는 체포될 것을 염려해 구베아 주교의 답장을 집으로 보낸 뒤 사은사 행차를 따라 다시 북경으로 갔고, 박해 상황을 구베아 주교에게 전한 뒤 귀국했다.

그해 6월 의주에서 체포돼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된 옥천희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고, 11월 15일 의금부로 이송돼 국문을 받았다.

옥천희는 여러 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편지를 주고받은 일, 천주당에서 주교를 만나 세례를 받은 일, 황심과 황사영 등과 결탁해 주문모 신부를 만난 일, 1801년에 다시 북경에 가서 나랏일을 서양인에게 전한 일 등의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1801년 12월 1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34세였다.

이후 조선 신자들은 1811년 북경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옥천희는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고 올바른 신앙을 지키다 순교했다”고 증언했다.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

서울 아현에서 태어난 황사영은 부친 황석범이 요절한 탓에 어머니 이윤혜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1790년 15살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같은 해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맏형 정약현의 큰딸 정명련(정난주, 마리아)과 혼인했다. 이 혼인은 그가 천주교를 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으니 같은 해 그의 처삼촌들과 처고모부 이승훈(베드로) 등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황사영은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교우들과 교류하며 밤낮으로 천주교 교리를 연구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많은 친척과 친구들이 교회를 멀리했지만, 그는 “천주 신앙은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으로 확신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황사영은 그에게 성사를 받고 교회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했다. 평신도 단체인 명도회 회원으로 여러 사람을 입교시켰고, 신심 서적을 필사했으며,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이러한 활동으로 1801년 신유박해 이전에 황사영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고, 조정에서는 박해 직후인 3월 23일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황사영은 이에 김한빈(베드로)과 함께 제천 배론에 있는 김귀동 집으로 가서 토굴에 은거했다. 그는 이곳에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지도층 신자들의 순교 소식을 듣고 신앙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방책을 적은 「백서」를 집필한다.

그는 1801년 10월 29일 북경 주교에게 보낼 백서를 완성했다. 그는 옥천희를 통해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옥천희가 그해 6월 체포됨에 따라 실패하고 만다. 그도 황심의 실토로 11월 5일 배론에서 체포되고, 백서도 압수되고 만다.

황사영은 의금부로 압송된 후 반역자로 지목돼 대역부도의 판결을 받고 1801년 12월 10일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정리=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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