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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 고선양・송백돌・최사관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19-12-13 17:26:17 | 조회 : 170

가톨릭평화신문  2019.12.15 발행 [1543호]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 약전


고선양 ・ 송백돌 베드로 ・ 최사관 예로니모




▨ 고선양(1803~1867)

고선양은 충청도 신창 창말(현 충남 아산시 선장면 대흥리) 출신으로 마을 이장이었다. 그는 어릴 때 교리를 배웠으나 가족의 반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중년에 부모를 설득해 온 가족이 함께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이후 그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교회 서적을 손수 베껴 교우들에게 나눠주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서모인 백프로타시아와 맏며느리, 셋째 며느리가 체포돼 공주로 압송됐다. 또 그의 아내와 막내아들도 서울 포교들에게 잡혀 압송됐다. 그의 아내와 막내아들은 체포된 이후 더 이상의 행적을 찾을 수 없다.


고선양은 남은 가족과 함께 피신했다가 서적 때문에 밀고를 당해 첫째 둘째 아들과 함께 공주 포교에게 체포됐다. 그와 두 아들은 영장 앞에 끌려가 문초를 받은 뒤 옥에 갇혔고, 그곳에서 먼저 체포된 백프로타시아를 만났다. 백프로타시아는 고선양 삼부자를 반갑게 맞으며 “이렇게 잡혀 왔으니 우리 모두 주님을 위해 순교해 천당의 영원한 복락을 누리자”며 권면했다.


고선양 삼부자와 백프로타시아는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고선양의 나이 64세, 백프로타시아는 74세, 장남은 24세, 차남은 21세였다. 이들의 순교를 전후해 고선양의 세 며느리도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맏며느리는 24세, 둘째 며느리는 21세, 셋째 며느리는 20세였다.



▨ 송백돌(베드로, 1823~1867)

송백돌은 서울 남묘(현 서울 용산구 도동 1가) 출신으로 어교(현 서울 중구 광희동 인근)에 살면서 갖바치로 생활했다. 그는 시흥 방아고지의 교우인 임씨와 결혼해 4남매를 얻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가 체포된 것은 1867년 2월이었다. 사기점을 하던 김경장이 체포돼 형벌을 받으면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발설했다. 우포도청으로 끌려간 송백돌은 감옥에서 김경장을 만나게 됐는데 그를 본 김경장이 “내가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자네 이름을 댔으니 용서해 주시게”라면서 잘못을 빌었다. 그러자 송백돌은 “당신이 내 이름을 대서 여기로 체포돼 온 것은 천주께서 나를 이리로 부르신 것이오. 그러니 마음에 두지 마시오”라며 김경장을 위로했다.


포도청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옥에 갇히자, 송백돌은 교리문답을 외고, 칼머리를 두드려 장단을 맞추면서 “즐겁게 천당으로 가자”며 교우들을 권면했다. 이를 지켜본 포졸들은 “여러 천주학쟁이 가운데 송백돌이 으뜸”이라며 칭찬을 마다치 않았다.


이렇게 옥살이를 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던 그는 1867년 3월 24일 이후 옥에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 44세였다.



▨ 최사관(예로니모, 1804~1868)

최사관 회장은 서울 황교(현 서울 종로구 원남동)에서 태어났다. 동촌에 사는 판서의 노비와 혼인해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상처했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 석방된 후 한 여교우와 혼인해 2남 1녀를 두었다.


그는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에게 회장으로 임명돼 교회의 중요한 일들을 맡아보며 전교에 힘썼다. 1856년 제4대 조선대목구장 베르뇌 주교가 입국한 뒤 다시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정의배(마르코), 홍봉주(토마스) 등 지도층 신자들과 교류하면서 열심히 교회 일을 돕고, 새로 입국하는 선교사들을 보살폈다. 또 자신의 집에 공소를 개설해 교우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끊임없이 전교해 김인협(야고보), 김창순(요셉) 등 여러 사람을 입교시켰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남대문 밖에 있는 집을 빌려 가족과 함께 피신했다. 그러던 중 베르뇌 주교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교우들과 함께 그 시신을 거두어 ‘와서’(瓦署, 현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에 안장했다. 이후 그는 최인서(요한) 등과 함께 선교사 영입을 계획하기도 했다.


최사관이 체포된 것은 1868년 초였다. 한 배교자가 그의 거처를 포교에게 밀고해 잡혔다. 좌포도청에 압송된 그는 다른 교우들을 밀고하지 않으려고 지난 일만을 진술했다. 그러면서 그는 “비록 형벌 아래 죽을지언정 절대로 배교하지 않겠다”며 신앙을 증거했다.


최사관은 1868년 3월 4일 사형이 집행되기 전 문초와 형벌을 받던 중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 64세였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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