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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33위' 약전 - 이유일・김조이・조치명・김우르시치나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20-01-08 17:08:02 | 조회 : 495


가톨릭평화신문  2020.01.12 발행 [1547호]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약전


이유일 안토니오 ・ 김조이 바르바라・ 조치명 타대오・ 김우르시치나

 


▨이유일(안토니오, 1819~1868)

이유일은 충청도 연풍 출신으로 일찍이 상경해 서울 소공동에 거주했다. 그는 1848년 29세 무렵에 부친에게 가톨릭 교리를 배운 후 이진여에게 세례를 받았고, 다블뤼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다블뤼 주교는 그를 “안토니오 부제”라고 부를 정도로 각별하게 생각했고, 이유일도 다블뤼 주교의 복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유일은 남종삼(요한), 권복(프란치스코), 김정갑(바르나바), 민유배(아우구스티노) 등에게 서적을 빌려주거나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켰다. 또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자기 집으로 모셔와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게 했다.

1865년 말부터 지도층 신자들이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프랑스와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자는 방아책을 흥선 대원군에게 건의했다. 이때 이유일도 동료 홍봉주(토마스), 김면호(토마스), 남종삼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유일은 또 흥선 대원군이 주교들과의 면담을 요청하자 다블뤼 주교를 모셔오고자 충청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약속과 달리 선교사들과의 만남을 미루다가 1866년 초부터 병인박해를 일으켰다. 박해가 시작되자 이유일은 강릉 계촌으로 피신해 있다가 그해 6월 24일 심능석(스테파노)과 함께 체포돼 서울 좌포도청으로 압송됐다. 이유일은 6월 30일 문초와 형벌을 받던 중 순교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김조이(바르바라, 1808~1865)

김조이는 경기도 고양에서 아전의 딸로 태어났다. 13세 때인 1821년 서울 아현에 사는 최한길과 결혼해 천주교 신자였던 시어머니에게 교리를 배워 1826년 세례를 받았다.

성품이 착했던 그는 술을 마시고 방탕한 생활을 하던 남편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 회심케 해 남편을 입교시켰다. 그는 평소에도 자주 “순교하면 좋겠다”는 말을 했는데 언젠가부터 병이 들어 집 안에서만 생활하게 되었다.

1858년 그는 정의배(마르코) 회장의 인도로 베르뇌 주교를 만나게 됐다. 이 만남 이후 그는 자기 집에 공소를 차려 여러 차례 베르뇌 주교를 모심으로써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게 했으며, 자신도 주교에게 견진성사를 받았다.

김조이는 1868년 6월 체포됐다. 이때 그는 기쁜 낯으로 자신이 천주교 신자임을 밝혔다. 좌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는 문초와 형벌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마당에 이르러 어찌 배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이라며 굳게 신앙을 증언했다. 그는 1868년 8월 11일 모진 형벌로 옥중에서 순교했다. 그의 나이 60세였다.



▨조치명(타대오, 1839~1868)ㆍ김우르시치나(1842~1868)

조치명은 경기도 광주의 양반 출신으로 죽산 용촌에서 살았다. 1870년 2월 23일 서울에서 순교한 조덕삼(시몬)이 그의 형이며, 1866년 10월 청주에서 순교한 조대여(판크라시오)는 그의 사촌 형이다.

조치명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적이 있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 7월에 아내 김우르시치나와 함께 죽산에서 체포됐다. 포교들이 그에게 “신자들과 친척들이 있는 곳을 대라”며 무수한 형벌을 가했지만 소용없었다. 부부는 관장에게 사형시켜줄 것을 간청했다. 이에 부부는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조치명의 나이 29세, 아내 우르시치나의 나이 26세였다.

한편, 부부가 투옥된 뒤 10살 된 아들이 밥을 구걸해 옥으로 가져오곤 했다. 그러자 김우르시치나는 그 밥을 함께 갇혀 있던 교우들과 나눠 먹곤 했으며, 밥이 부족하면 자신이 굶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우르시치나는 아들을 불러 “우리는 이제 곧 죽게 될 것이니, 더 이상 부모를 생각하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했다. 이 말대로 그의 아들은 고향으로 갔다가 얼마 뒤 다시 부모를 만나려고 죽산 관아로 갔는데, 그때는 이미 부모가 순교한 뒤였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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