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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0년] 박정일 주교, ‘사제의 꿈’ 위해 월남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20-01-23 09:55:42 | 조회 : 532

가톨릭평화신문 2020.01.19 발행 [1548호]



‘사제의 꿈’ 위해 월남… 전쟁의 고통 속에 옮겨 다닌 피란지 신학교


[한국전쟁 70년, 갈등을 넘어 화해로] 
(3)1926년생 박정일 주교가 기억하는 한국전쟁


▲ 컴퓨터에 정리해 놓은 자료 사진을 보여 주며 
한국전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박정일 주교


한국전쟁 중에도 가톨릭교회의 사제 양성은 계속됐다. 북한의 덕원신학교는 폐쇄됐지만, 남한의 서울신학교는 전쟁 발발 후 6개월간 휴교한 뒤 1951년 1월 제주로, 같은 해 5월 부산으로 옮겨가며 ‘피란지 신학교’를 열었다. 그 와중에 새 사제도 탄생했다. 1950년 10월 28일에는 대구에서 4명, 11월 21일에는 서울에서 8명이 사제품을 받았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모두 41명이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했다. 1952년 4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쳐 신학생 7명을 프랑스(4명)와 이탈리아(3명)로 유학을 보냈다. 교회가 사제 양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엿볼 수 있다.



전쟁 당시 신학생이었던 박정일(전 마산교구장) 주교는 192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났다. 뒤늦게 성소를 발견한 그는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1948년 9월 덕원신학교에 입학했다. 북한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이듬해 덕원신학교는 폐쇄됐다. 박 주교는 사제가 돼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홀로 월남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따라 대구로, 제주로, 부산으로 옮겨 다녔고 유학생으로 선발돼 1952년 8월 14일 로마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그가 기억하는 70년 전 이야기를 듣기 위해 인터뷰를 청했다. 박 주교는 구순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다. 목소리는 단단했고, 거동에도 불편함이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일어난 사건의 연도와 날짜도 정확히 기억했다.



-올해 아흔다섯이시죠. 한국전쟁 당시엔 스물다섯 청년이셨습니다.

“그렇게 되나요. 이제 어디 가서 나이 자랑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 당시 이야기….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아이고 그 시절 참 고생 많았죠.”



-한국전쟁 전, 덕원신학교에 다니셨지요.

“우리 부모님은 신자가 아니셨어요. 신학교에 간다니까 어머니 반대가 특히 심했어요. 3년간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가출도 했었어요. (웃음) 그러다 제가 병이 났는데 어머니는 ‘저 녀석이 신학교 못 가게 하니까 앓아눕는구나!’ 하면서 신학교 입학을 허락하셨죠. 학기 시작 피정 때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님이 오셔서 30분간 강론을 하셨는데, 말씀을 너무 잘하셔서 놀랐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신학교에 가겠다는 결심은 언제 하셨는지요.

“평양에서 숭인상업학교 다니면서요. 세례도 그때 받았고요. 백민관 신부를 상업학교에서 만났죠. 백 신부는 이미 천주교 신자였어요. 토요일마다 백 신부랑 기림리성당에 가서 놀았는데 홍도근 신부님이 계셨습니다. 전기 박사로 불리던 분이라 재주가 많으시고 재밌으셨어요. 그분을 보며 신부가 돼야겠다 생각했어요.”



-덕원신학교 생활은 1년도 채 못하셨죠.

“1949년 5월 7일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밤사이 경찰들이 신학교 옆 베네딕도 수도원에 들이닥쳐 아빠스님과 독일 신부님, 수사님, 교수 신부님들을 모두 잡아갔다는 거예요. 창밖을 보니 경찰이 두세 명씩 짝지어서 신학교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무서웠죠. 5일간 숙소에 갇혀 지냈습니다.”



-언제 풀려나셨습니까.

“5월 13일에 경찰이 학교를 폐쇄하니 모두 집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짐을 챙기는데 묵주나, 성상, 성경은 가져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학교에 있던 성작이나 성광 같은 성물은 부제와 상급생들이 주방에 근무하는 분들을 통해서 몰래 밖으로 옮겨 놨다고 하더라고요. 신학생들은 짐을 싸서 다음날 평양 주교관으로 갔지요.”



-홍용호 주교님도 납치당하고 당시 평양도 어수선하지 않았습니까.

“김필현 신부님께서 홍 주교님 대신 교구 책임을 맡고 계셨습니다. 신학생들을 보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셨어요. 여기선 학업을 계속할 수 없으니 가능하면 월남해서 공부를 계속 하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제의 꿈을 버릴 수 없던 박 주교는 고향으로 돌아와 남몰래 월남 계획을 짰다. 수소문 끝에 평양에서 월남을 돕는 신자를 소개받았다. 1950년 2월 말이었다. 첫 시도는 무참히 실패했다. 평양에서 해주까지 갔지만, 정치보위부원에 발각돼 두 달 넘게 유치장에 갇혔다. 심문과 폭행, 굶주림을 견디고 나니 겨우 풀려났다. 그때가 5월 초 봄이었다. 6월엔 전쟁이 났다. 그는 청년들을 강제 징집하는 북한군에 끌려갔지만, 용케 도망쳤다. 한동안 산에서 숨어 지내다가 신학교 소식이 궁금해 무작정 평양으로 향했다.



-그때 평양에서 서울로 오신 거군요.

“중공군이 몰려오던 때라 평양도 피란민들로 가득했습니다.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 상황이 아니었죠. 관후리성당에선 캐롤 몬시뇰이 신자들에게 확인서를 써줬습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 신자인데 편의를 봐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도 그 쪽지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나가던 미군에게 쪽지를 보여주고 차량을 얻어 타 대동강을 건넜습니다. 그 뒤론 하염없이 걸었죠. 어딜 가든 도로와 주변 논밭엔 시체들이 있었습니다.”



-서울까지 얼마나 걸리신 겁니까.

“12월 초 평양을 떠났는데 12월 23일 서울에 도착했어요. 이틀 뒤 명동성당에서 성탄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믿기지 않았죠. 그날 성당에서 덕원신학교 신학생이던 황춘홍 신부를 만났어요. 황 신부가 혜화동에 신학교가 있고 신학생도 있다고 알려줬어요. 곧장 달려갔지요. 혜화동에서 정의채 몬시뇰과 김진하 신부도 만났습니다. 그제야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제주 피란지 신학교 신학생 단체 사진. 
1951년 4월 22일이라고 날짜가 적혀 있다.




-서울신학교 학생이 되신 건가요.

“정규만 신부님이 학장이셨는데, 저를 반갑게 받아주셨습니다. 남아있는 신학생들과 함께 영등포역에서 피란 열차를 타고 대구로 갔습니다. 대구에 가니 신학생 30명이 주교관 옆 부속 건물에 모여있었습니다. 1951년 새해를 대구에서 맞았어요.”



신학교는 신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제주로 피란하기를 결정했다. 그러나 막상 제주도 안전하지 못했다. 무장 공비들이 시도때도없이 출몰해 약탈과 납치, 살인을 일삼았다. 신학생들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신학교는 다시 부산 영도로 옮겼다. 박 주교는 “그제야 생활이 좀 안정됐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이듬해 박 주교는 로마 우르바노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부모님은 영영 못 만나신 겁니까.

“1951년 여름에 인천에서 만났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여동생 셋만 월남했더라고요. 형들과 형수님 그리고 조카들까지 이동하긴 어려웠던 거죠. 아버지께서 해주에서 밀선을 구해 인천으로 오셨습니다. 남쪽에 오자마자 저를 찾으셨는데 ‘이놈이 살아있다면 분명 신학교에 있을 거다’라고 생각하셨답니다. 답동성당에 가서 우리 아들이 신학생인데 확인 좀 해달라고 하셨고, 부산 신학교에 있던 제게 연락이 닿은 겁니다. 그 길로 인천으로 가서 부모님을 뵈었죠.”



-다시 만난 부모님을 두고 유학을 떠나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꼭 사제가 돼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면 모든 걸 버리라고 하셨으니까요. 그래도 철이 없었던 것 같아요. 겨우 만난 아들을 다시 떠나 보내야 하는 부모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죠. 그래도 제가 로마로 떠나고 2년 뒤 부모님께선 부산에서 세례를 받으셨어요. 감사한 일이지요.”



그는 “신학생이었기에 전쟁 중에 부모님도 만날 수 있었고, 신자들에게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이어 “전쟁의 비참함이야 말하지 않아도 다 알지 않느냐”면서 “살아있는 우리가 할 일은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는 일뿐이다”고 강조했다.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됩니다. 평화를 위해선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한국전쟁 70년을 기억하는 구순의 주교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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