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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권철신의 남행 계획과 그들이 꿈꾼 공동체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20-05-20 15:56:30 | 조회 : 222

가톨릭평화신문 2020.05.24 발행 [1565호]




성호학파, 서학의 사유 받아들이는 전위적 학술집단 꿈꾸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 권철신의 남행 계획과 그들이 꿈꾼 공동체




▲ 1776년 2월 24일, 권철신이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 
중간에 밑줄 친 부분에 남쪽으로 내려가는 계획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원본 천진암 성지 소장)




▲ 1776년 10월 15일에 쓴 이벽의 이병휴 제문. 이벽의 유일한 친필이다. 
이병휴의 사랑을 받은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소장처 불분명) 



1785년 홍유한의 부고를 듣고 권철신(암브로시오)이 지은 제문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아! 한 구역의 땅에 터를 잡고 손을 잡고서 함께 돌아가는 것은 제가 예전부터 품었던 소원이었습니다. 또한, 동지 몇 사람이 십수 년 동안 꼼꼼히 얽어 준비한 계획은 마침내 일과 마음이 어긋나 중도에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홀로 천리 밖 영남에서 공이 홀로 지내면서 한 사람도 따름이 없어, 살아서는 서로 힘이 되지 못했고, 죽어서도 서로 알지 못했으니 제가 공을 저버림이 크다 하겠습니다.(嗚呼! 擬卜一區, 携手同歸, 是小子夙昔之志願, 亦同志數人, 十數年綢繆謀畵者, 而畢竟事與心違, 中道解散. 獨僑公於千里嶺外, 而無一人相隨, 生不相將, 死不相知, 小子之負公大矣.)”



홍유한, 1775년 영주 구구리로 터전 옮겨

동지 몇 사람과 영남 지역으로 이주해서 함께 살며 공부하기로 한 계획을 생전에 이루지 못해 안타까워한 내용이다. 홍유한은 충청도 예산 여사울에 살다가 1775년에 영주의 구구리로 터전을 옮겼다. 그의 이주는 스승 성호가 오래전부터 꿈꾸었던 유학의 본고장 영남으로의 이주를 결행한 것이어서, 동료 선후배 학자들의 지지와 선망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이주는 그 혼자만이 아닌, 권철신과 이기양 등 뜻맞는 후배들과의 공동 이주 계획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이 공동 이주의 첫 단추를 홍유한이 앞장서서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1763년 성호 이익의 사망 후에 성호학파의 중심은 경기도 안산에서 충남 예산으로 옮겨갔다. 성호의 조카였던 정산(貞山) 이병휴(李秉休, 1710~1776)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성호의 영향으로 진작부터 「칠극」 같은 서학서를 접하고 있었고, 홍유한이 예산 땅으로 이주를 결심한 것도 성호학파의 재편 구도와 맞물려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당시 권철신이 이병휴에게 보낸 편지에는 성호의 유집을 어서 정리해 정본을 만들어야 한다고 거듭 재촉하고 있었다. 이병휴는 자신의 건강과 집안일로 인해 이 작업에 온전히 몰두하지 못하는 사정을 전하며 답답해 했다.

하지만 이병휴의 양명학적 사고와 서학에 대한 개방적 태도는 성호학파 소장 그룹들을 열광시켰다. 그의 문집 「정산고」에는 서양 선교사와 서학서에 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권철신, 이기양, 그리고 이벽(요한 세례자) 등 차세대 성호학파를 대표하는 신진기예들이 예산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독특한 색깔을 띤 한 흐름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주자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양명학의 수용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다시 서학으로 경사(傾斜)되는 선상에 이들은 서 있었다. 이벽만 해도 1774년 예산까지 직접 내려가 6, 7개월간 이병휴를 스승으로 모시고 착실하게 공부했다. 이벽이 집으로 돌아간 뒤 이병휴는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 그의 공부를 독려했다. 이 내용은 이병휴를 조문한 이벽의 유일한 친필 제문 속에 남아있다. 이 제문은 1776년 10월 15일에 쓴 것이다. <사진 2>



남행 계획, 여러 가지 암초 만나며 무산

1775년 홍유한과 권철신 그룹의 돌연한 영남 이주 계획은 이병휴의 학문 자장에서 한 번 더 벗어나, 서학의 사유를 받아들이는 좀더 전위적인 학술집단의 실험을 꿈꾼 것이었듯 하다. 이병휴는 1775년 3월, 「영남으로 가는 홍사량을 전송하며(送洪士良之嶺南序)」에서 성호가 일찍이 말한, “지금 세상에 인륜이 있는 고장을 구하려 한다면 영남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한 말을 제시하며, 그 꿈을 홍유한이 마침내 이루게 된 것을 축하하고 부러워한다고 적었다. 이병휴는 이듬해 세상을 떴다.

하지만 이들의 남행 계획은 실행 단계에서 여러 가지 암초를 만났다. 천진암 성지에는 홍유한 집안의 편지 수백 통이 보관되어 있다. 이중 당시 권철신이 홍유한에게 보낸 편지 수십 통이 남아있다. 1776년 2월 24일의 편지는 홍유한이 영남으로 이주한 이듬해인 1776년 초에 홍유한의 부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쓴 글이다. 그중 한 대목을 소개한다.

“우리가 남쪽으로 넘어가려는 계획(南踰之計)은 실은 곤궁하여 스스로 밥을 먹지 못하는 데서 나왔으니, 하늘의 궁액이 족히 미치지 않을 것 같았지요. 올해 형께서 배필을 잃은 것은 형 집안의 흥망과 관계된 것일 뿐 아니라 우리도 대부분 낭패스럽습니다. 이기양은 중도에 머물고 있는데다, 야능(也能) 또한 7분(分)은 물러선 상태여서, 마침내는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吾南踰之計, 實出於窮不自食. 而天之厄, 足如不及焉. 今年兄之喪配, 不但兄家興亡所關, 吾輩擧皆狼狽. 士興中路滯留, 也能亦七分退步, 未知畢竟之如何.)” <사진 1>

당시 이기양은 영남으로 이주하던 도중에 이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중간의 남천(南川)이라는 곳에서 임시로 체류하고 있었다. 글 속의 야능(也能)은 권철신의 형제 중 한 사람이었던 듯한데, 다른 자료를 더 살펴봐야 확인이 가능할 것 같다. 다만 족보에는 홍유한의 부인 평강 채씨가 1792년에 세상을 뜬 것으로 나와, 편지 속 상배(喪配)의 앞뒤 사정이 궁금해진다.

이어 1776년 4월 24일의 편지에서는, “우리가 남쪽으로 내려가려던 계획은 하늘이 틀림없이 이를 막아 희롱함이 이 지경에 이르려 하니, 참으로 또한 이상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진실로 물리기는 어려워서, 가을이 지나 안식구라도 짐을 싸서 보내려고 합니다(吾輩南計, 天必欲沮戱之至此, 誠亦異矣. 然鄙意誠難退步, 秋後欲治送內行)”라고 썼다. 이들의 남행 계획은 이미 취소하기 어려울 정도로 구체화돼 있었다.

다시 한 달 뒤인 5월 24일의 편지에서는 “남쪽으로 이사하는 문제는 지금 다시 의논함이 없지만, 이곳의 집과 땅은 지금은 조금도 아까운 마음이 없습니다.(南丘搬移, 今無更議. 此處庄土, 今則少無惜之心)”라고 했다. 남행 계획을 완전히 접게 된 사정이 감지된다.

그런데 이 편지의 끝에 묘한 사연이 덧붙었다. “이기양 또한 무사하고, 그 아들 총억이 이제 막 와서 저 있는 곳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존창이라는 자가 또한 따라와서 고풍(古風)의 체제로 지었는데, 자못 재주가 있어서 기뻐할 만합니다. 아드님은 글로 말할 수 없어 이 뜻으로 내려서 폅니다.(士興亦無事, 其子方來, 學鄙所耳. 存昌者亦隨來, 做古風製, 才頗有之, 可喜. 令胤許不能有書, 此意下布焉.)”



‘내포의 사도’ 이존창도 남천에서 합류

여기서 난데없이 ‘내포의 사도’로 초기 천주교회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온다. 이존창은 알려진 대로 이전 홍유한이 살았던 예산 여사울 사람이다. 당시 18세였던 이존창이 권철신에게 가서 공부한 것은 홍유한의 뜻이었을 것이다. 홍유한은 서울서 과거 시험 준비를 하던 자신의 아들 홍낙질(洪樂質)까지 그리로 보내 공부 모임에 합류시켰다.

이존창의 이름은 1777년의 편지에서도 “여행 중에 이기양과 함께 이존창의 집을 빌려 유숙하였다”고 한 것에서 한 번 더 확인된다. 이때 두 사람이 예산을 다시 찾은 것은 이병휴가 마무리하지 못한 성호 유고의 정리와 수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호의 원고는 난필의 초고 뭉치여서, 1774년 이병휴가 1차 정리를 마친 뒤에도, 질서류(疾書類) 저작은 손조차 못 대고 있었다. 이것이 일부나마 본격적으로 정리된 것은 다시 근 스무 해가 더 지난 1795년 다산 정약용(요한 사도)이 이삼환을 좌장으로 모시고 모임을 주도했던 온양 봉곡사의 서암강학회에서였다.

오래 꿈꾸었던 남도(南渡) 계획이 최종 무산되자, 권철신은 다음 행동으로 자신이 살던 양근에서 이 같은 학문 공동체의 꿈을 실행에 옮기고자 했다. 권철신, 이총억, 이존창, 그리고 홍유한의 아들까지 10여 명의 젊은이가 합류한 상태에서 그들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그들이 했던 공부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한 과거 시험 공부뿐이었을까?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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