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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상의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리는 ‘오래된 미래’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20-05-28 11:35:17 | 조회 : 103

가톨릭평화신문 2020.05.31 발행 [1566호]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개관 1주년 기념] 

사상의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리는 ‘오래된 미래’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관장 원종현 신부)은 개관 1주년을 맞아 기존 상설전시를 개편해 지난 6일 재개관했다.  제1전시실에는 조선 시대 사상사의 흐름과 함께 한역서학서와 한역교리서를 통해 서학이 학문에서 신앙으로 전개되는 과정과 천주교의 박해가 이루어진 시대적 배경을 다루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개관 1주년 기념해 조선 후기 사상계의 전환기적 특성을 주제로 새로 단장한 제1전시실을 지상 중계한다.

지상전은 이번 전시를 직접 기획, 참여한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학예사들과 전시자문위원들이 꾸몄다.



1. 성리학의 나라, 조선



▲ 해동건곤존주대의 조선의 성리학은 의리론과 명분론에 집착했다. 
명이 청에 의해 망한 이후 조선은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를 표방하며 
주자의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 조선의 사대부가 가져야 할 본분이라고 생각했으며, 
예를 철저히 지킴으로서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재건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 국조오례의 조선의 통치이념은 유교였으며, 
‘경국대전’ 등의 법전과 ‘국조오례의’ 등의 예전이 그 시행의 근간이 되었다.




조선의 통치이념은 유교였으며, 법전과 예전이 그 시행의 근간이었다. 그리고 건국 이후 한 세기 동안 성리학에 기초한 사회체계를 정립하였다. 하지만 16세기 중반부터 다양한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있었고, 인조반정(1623)에 의한 서인과 남인의 연합 정권이 들어섰다. 정묘ㆍ병자호란을 겪고, 명ㆍ청 교체라는 격동기를 맞았다. 이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 실정에 맞는 융통성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변통’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다양한 개혁정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2. 흔들리는 조선왕조

▲ 국조오례의 조선의 통치이념은 유교였으며, 
‘경국대전’ 등의 법전과 ‘국조오례의’ 등의 예전이 그 시행의 근간이 되었다.



▲ 계곡만필
조선 중기 문신 장유(1587-1638)의 수필 평론집. 
이 책 내용을 바탕으로 성리학 내에서 허학을 반성하는 목소리가 생겨났다. 
또 다른 유학의 일파였던 양명학과 실학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18세기 조선 사회는 성리학의 변질과 누적된 폐단으로 인한 개혁의 목소리가 높았던 변동기였다. 권세가들이 정국을 주도했고, 관리들의 착취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신분제는 급속히 붕괴했다. 19세기를 거치며 이러한 모순은 극대화됐고 국가의 구심점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보 학자들은 지행합일의 실천을 중시하는 양명학에 관심에 이어 성리학의 한계를 넘어 현실을 개혁하려는 실학사상을 탄생시켰다.

 

3. 새로운 사상을 찾아: 북학론과 서학

▲ 천주실의 
마태오 리치 신부가 저술한 한역서학서. 
그리스도교의 유일신을 유교의 상제(上帝)와 결부 지어 천주(天主)라는 개념으로 중국에 소개하고 있다.



 16세기 말 중국에 선교사들에 의해 천주교와 서양문물이 전파됐다. 조선의 지식인들도 사신 왕래를 통해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번역하거나 저술한 서양서적인 ‘서학서’를 꾸준히 접했다. 그러나 조선은 명(明)을 계승한 소중화(小中華)이며, 청(淸)은 오랑캐라는 명분주의에 밀려 본격적으로 연구, 수용하지 못했다.

  18세기 말 박지원, 홍대용 등 학자들은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려면 청나라를 본받아 앞선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론을 펼쳤다. 아울러 권철신, 이벽 등 '서학서'를 통해 서양 문명을 알게된 진보적 학자들은 북학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청나라를 넘어 아예 세계로 시야를 넓힐 것을 주장한다. 조선사회에 팽배한 중국 중심의 세계관과 유교의 가부장적 신분질서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을 서학에서 찾은 것이다.




4. 주어사 강학



▲ 칠극
예수회 선교사 판토하 신부가 지은 수덕서로 7가지 죄악의 근원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7가지 덕행을 담고 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칠극이 유교의 극기설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1779년 겨울, 경기도 양근 주어사에 권철신, 정약전, 이벽, 김원성, 권상학, 이총억 등의 젊은 학자들이 모였다. 이들은 남인들로, 18세기 전반 서학에 대해 가장 조예가 깊었던 성호 이익의 문인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교조적으로 흐르던 기존의 성리학을 극복할 새로운 사상을 찾고 있었다.

 열흘 넘는 기간 동안 권철신이 정한 엄격한 규칙을 따라 공동생활을 하며 윤리적, 철할적 명제에 관해 토론하고, 기존의 다양한 학설들을 깊이 검토했다. 그 과정에서 한역서학서들과 「천주실의」 「칠극」등 천주교 교리와 서양의 상황을 설명한 책들도 연구했다. 이들은 유교의 경전에서 찾지 못하던 대답을 천주교에서 발견했다. 유학을 연구하던 강학이 천주교 교리연구회가 된 것이다. 조선 사회의 천주교 신앙공동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자 선행적 바탕이 이모임에서 마련됐다.



5. 학문을 넘어 신앙으로, 인간 중심으로 시작하다.


▲ 주어사 강학



주어사 강학 이후 참가자들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운동이 자라났다. 이벽의 권유를 받고 이승훈은 1783년 연행사인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가서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다. 귀국 후 이승훈은 수표교 근처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후 정약용, 권일신, 최창현, 김범우 등 10여 인에게도 세례를 줌으로써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조선에 알리기 시작했다.
 

이는 세계 천주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평신도 지식인들이 서학 연구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신앙을 수용하고 세례로 말미암아 결속된 신앙공동체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이 같은 평신도 중심의 신앙공동체는 10년 뒤 조선에 처음 선교사가 입국할 때까지 지속됐다.

신앙공동체의 형성 후, 교세는 날로 확장됐다. 신앙모임은 중인 김범우의 집이었던 명례방에서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신분적 한계를 관념적으로 나마 극복할 수 있었기에, 신앙모임은 점차 신분층을 넓혀가며 확대돼 갔다.




6. 사학이 된 서학: 습속(習俗)의 벽에 갇히다.
 



 초창기 천주교 신앙은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인식돼 배척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1785년 명례방 집회가 적발된 ‘을사추조적발사건’, 1787년 정약용, 이승훈 등의 신앙모임이 탄핵받은 ‘정미반회사건’ 등이 있었지만, 서학에 비교적 관대했던 정조의 묵인으로 큰 박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황청의 조상제사 금지령에 따라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는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의 서학계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 사건은 정부 당국뿐 아니라 보유론에 근거한 천주교 신앙을 바탕으로 형성된 초기 신앙 공동체 내부의 진영논리 안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결과 유학에 기초해 서학을 이해하고자 했던 초기 천주교의 지성들이 신앙을 포기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됐다. 이때부터 상당수 지식인이 이탈된 천주교는 민중 중심의 신앙공동체가 되어 산속으로 숨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일은 앞으로 100년 동안 이어질 오랜 천주교 박해의 서막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 신앙의 수용과 실천들로 이루어진 그간의 노력이 조선의 전통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천주교는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는 ‘사교’ 집단으로 낙인 찍히게 되었고, 인간존중과 평등을 추구하는 천주교의 교리는 조선사회의 근간이었던 신분제를 흔들며 왕권과 유교 사회를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져 지배 세력들에게 박해할 명문을 줬다. 게다가 조선의 위정자들은 천주교 탄압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관철하는 데 이용했다.




7. 100년의 박해


 진산사건 이후, 본격화된 천주교 박해는 100년간이나 지속됐다. 정조의 죽음 이후 실권을 잡은 정순왕후는 노론이자 공서파인 영의정 심환지 등과 결탁해, 정적인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교를 근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가작통의 연좌제를 시행해 천주교가 다시 싹조차 나지 않게 뿌리를 뽑고야 말겠다는 공개적인 선전포고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전부가 아니었다. 이후 전국적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여 배교를 거부하면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했다. 박해는 길고 가혹했다. 1801년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부터 1873년까지 병인박해 등 네 차례의 대박해가 일어났다. 박해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따른 선교사들의 거주와 활동이 보장되고, 1899년 교민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명문화되기까지 한동안 계속됐다.


 조선 519년의 역사 속에 100년이 넘는 세월의 박해와 순교의 역사였다. 과연 얼마나 죽었을까? 조선 말기 한성부 내 인구가 20만이 채 안 되던 시절 전국적으로 3만 명 이상, 이 땅의 백성들이 자신들의 신앙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단순히 종교 간의 갈등 혹은 문화적 충돌이라고 말하기에는 논리가 너무 빈약하다.



8. 나가는 말

 

  18세기 후반 조선의 사상계에서는 성리학의 수용 초기에 등장했던 척사위정의 논리가 다시금 제시되어 강화되어 갔다. 척사위정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사회운동으로 정학인 성리학과 정도인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사학으로 보아서 배격하는 운동이었다. 18세기 후반기에 출현한 새로운 사상에 대한 대결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세기 이래 서학, 즉 천주교 신앙이 사학의 대표적 사례로 지목되었다면 19세기 중엽에는 동학 또한 사학의 한 갈래로 등장했다.




▲ 경천 
안중근(토마스) 의사가 1910년 3월 뤼순감옥에서 사형집행을 앞두고 쓴 유묵.
경천은 ‘하느님을 공경하라’는 의미다.



 

이학주 기자 goldmouth@cpbc.co.kr

 

 천주교 지도층 신자들이 줄줄이 체포됐다. 권철신은 의금부에서 매질을 받다 죽고, 이승훈ㆍ홍낙민ㆍ최창현ㆍ강완숙 등 40여 명은 서소문 밖 네거리 형장에서 망나니의 칼에 참수됐다. 300명 내외의 천주교 신자들이 1801년 신유박해로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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