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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 교회, 신분의 벽을 허물다.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20-11-03 09:04:12 | 조회 : 57
가톨릭평화신문 2020.11.01 발행 [1586호]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홍낙민이 풀어준 노비의 아들이었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24. 교회, 신분의 벽을 허물다



▲ 형의 반대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이존창이 식솔을 데리고 한겨울에 고향을 떠나고 있다.
그림=탁희성 화백




명례방 집회와 관련한 새로운 기록

강세정의 「송담유록」을 좀더 소개해야겠다. 성립기 조선 교회의 정황에 대한 몇 가지 기록들이다. “계묘년(1783) 겨울에 이동욱(李東郁, 1739~?)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들어가게 되자, 그의 아들 이승훈이 수행하였다. 조선관(朝鮮館)에 머물 적에 자주 천주당을 왕래하여 날마다 머물러 자고 돌아왔다고 한다.(당시 다른 사신을 수행했던 막료(幕僚) 비장(裨將)의 말이다.) 사서(邪書) 중에 이전에 나온 적이 없었던 허다한 책자들을 모두 사가지고 왔고, 그들이 가르치고 공부하는 방법까지 다 배워서 왔다. 이때 이후로 그 교법(敎法)이 크게 갖추어졌다.”

이승훈이 천주당에서 날마다 머물러 잠까지 자며 천주학을 배웠다는 내용이다. 강세정은 당시 연행에 수행했던 비장의 전언을 직접 들었던 듯하다. 여기에 더해 당시 이승훈이 수많은 천주교 관련 서적을 지니고, 교학 방법까지 다 익힌 채 돌아온 사실을 적었다. 실제 귀국 이듬해인 1785년 3월 명례방 집회 당시, 이들이 모두 예수 상본을 담은 주머니를 들고 있었고, 이미 「성경광익」과 「성년광익」 같은 책을 바탕으로 주일 미사까지 드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승훈이 귀국 시에 가져온 천주교 관련 물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뒤에 따로 살필 기회를 갖겠다.

명례방 집회 검거 이후 권일신이 이윤하, 이총억 등 5인과 함께 추조로 들어가서 성상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을 때, 형조판서 김화진의 반응과 이후 이총억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누누이 호소하자, 형조판서가 그중 아무개와 아무개를 심문하고는 크게 꾸짖어 말했다. ‘너희들은 모두 이름난 집안의 사대부의 자식인데, 어찌하여 이런 외교(外敎)로 들어갔더란 말이냐? 너희는 상민과는 다르므로 형벌이나 매질을 하지 않고 특별히 놓아 보내 준다. 다시는 이 학문을 하지 말거라.’ 단지 김범우만 엄형에 처하고 귀양 보냈다.”

다음 한 단락이 더 흥미를 끈다. 「송담유록」의 저자인 강세정은 같은 남인으로 이기양과도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하루는 그의 아들 이총억이 이웃에 와서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세정은 일부러 이총억이 머물던 곳으로 찾아가서 물었다. “네가 추조의 뜨락까지 들어갔다던데, 사대부는 산송(山訟)이 아니고는 그곳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네가 나이 어린 선비로 어찌하여 패악스러운 거동을 하는 게냐?” 이총억의 대답은 이랬다. “성상(聖像)에 재앙이 박두한지라 어쩔 수 없이 고하여 호소하였습니다.(禍迫聖像, 故不得不告訴云.)” 이 말을 듣고 강세정은, “네가 이미 예수를 두고 성상이라 하는 것을 보니 거기에 빠진 것이 심하구나” 하고는, 이후 다시는 그를 보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러고 나서 “총억은 그 숙부인 이기성과 함께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물든 자이다”라는 말을 더 보탰다.



이기성의 놀랍고 해괴한 행동

이기성은 이기양의 동생이자, 안정복의 손녀사위였다. 안정복이 이 일로 이기양과 일전을 벌였던 일은 앞서도 살폈다. 이기성은 권일신이 형조에 찾아갔을 때 함께 갔던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당시 관련 기록에서 그의 이름은 빠져 있다. 그가 5명과 함께 간 것이 아니라, 혼자서 따로 찾아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송담유록」에 그 이기성에 관한 기록이 더 나온다.

신사원(申史源)은 1791년 진산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진산 현감으로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이보다 앞선 1785년 8월에 예산현감으로 부임했다. 1787년 4월,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던 심환지가 올린 보고를 통해 볼 때, 신사원은 여러 마을을 직접 찾아다니며 사민(士民)의 말을 듣고, 읍리로 들어가 아전과 장교의 정상을 살펴 모든 사람이 입을 모아 훌륭한 사또라고 칭찬했던, 인격적으로 훌륭한 인물이었다.

「송담유록」은 이렇게 말한다. “신사원이 뒤늦게 벼슬에 나아가 예산 현감이 되었다. 그 땅과 접해있는 천안 여소동(余蘇洞)에 이존창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홍낙민(洪樂敏, 1751~1801)이 속량해준 노비로, 자못 문필을 알아 홍낙민에게서 수업했다고 한다. 그는 오로지 사학만 공부하여 근처에서 이름이 있었다. 상민은 말할 것도 없고 남녀노소가 서로서로 전하여 익혔다. 신사원이 공문을 보내 붙잡아서 천안의 감옥에다 가두었다.”

여소동은 여사울의 또 다른 표기다. 여사울은 천안에 속한 월경지로 예산군 안에 있었으므로 예산 현감 신사원이 이존창을 체포해서 천안으로 이송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존창이 처음으로 체포된 것은 1791년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그보다 4년 앞선 1787년에 이미 신사원에 의해 이존창이 체포되어 천안 감옥에 이송되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이 일이 1787년의 일인 것을 어찌 알 수 있는가? 다음 이어지는 기록 때문이다.

“이기성이 이 말을 듣고는 곧장 옥문 밖에 가서 이존창에게 절을 올린 뒤에, 자기도 함께 죽기를 원하였다. 천안 군수 조정옥(趙鼎玉, 1733~?)은 평소 이기성과 친숙했던 터라 불러와 몹시 꾸짖었지만 듣지 않았다. 온갖 방법으로 달래자 그제서야 떠나갔다. 이존창이 비록 상민이지만, 그의 서학에 대한 조예가 깊고 독실했기 때문에, 사학을 하는 일파들이 마치 스승처럼 높여서 그를 섬겼다. 이기성이 예로써 대한 것 또한 이 때문이었다.(基誠聞之, 直往獄門外, 納拜於存昌, 願與之同死. 主守趙鼎玉, 素所親熟, 故招致切責, 不聽. 萬端開誘, 始爲離去. 盖存昌雖常漢, 其造詣深篤, 故邪學一派, 尊事之如師傅. 基誠之禮待, 亦以此也.)”

「일성록」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조정옥이 천안 군수로 내려간 것이 1787년 2월 4일이고, 그해 11월 9일에 평양 서윤으로 전보되어 천안을 떠났다. 그러니까 이존창이 검거되어 천안 감옥에 갇힌 것은 1787년 2월에서 11월 사이의 일일 수밖에 없다. 신사원은 1785년 8월 10일에 예산현감으로 부임해, 1789년 6월 20일에 진산 현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존창에 대한 새로운 사실

위 기록에서 우선 이존창이 홍낙민이 속량((贖良)해준 노비였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진다. 사실 그간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많았다. 뒤쪽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이존창은 천안의 상한(常漢)으로 홍낙민이 속량시켜준 종의 아들이었다. 홍낙민과 이기양에게서 글을 배워, 글씨도 잘 썼고 시에도 능했다. 사학(邪學)에 조예가 깊어 인근을 교화시켰다. 마을 사람 중에 다른 고을의 양민과 혼인한 사람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교화되어 사학을 하니, 덕산과 홍주, 예산과 청양, 정산의 사이가 온통 사학에 빠져들었다. 이에 한글로 전하여 가르쳤다(存昌卽天安常漢, 而樂敏贖奴之子. 學書於樂敏基讓, 能書能詩. 深於邪學, 隣近化之. 洞民之連姻他邑常漢, 毋論男女, 皆化爲邪學. 如德山洪州禮山靑陽定山之間, 一例陷溺, 乃以諺文傳授)”고 적었다. 이존창 자신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홍낙민 집안의 종이었고, 홍낙민이 그를 속량시켜 노비의 신분을 면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존창은 시문에 능하고 글씨까지 잘 썼을 뿐 아니라, 천주교에 대한 깊은 조예로 내포 일대가 천주학의 진앙지가 되게 했다고 썼다.

이존창이 천안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이기양의 동생 이기성이 보인 행동은 참으로 뜻밖이어서 놀랍다. 우선 그는 명례방 사건 당시 형조에 뛰어들었던 것과 똑같이, 이번에는 멀리 천안 감옥까지 이존창을 찾아갔다. 찾아갔을 뿐 아니라, 옥문 밖에서 옥에 갇힌 이존창을 향해 큰절까지 올렸다. 양반이 종의 자식에게 큰절을 올린 셈이다. 그러고는 천안 군수 조정옥을 찾아가 자기도 이존창과 함께 죽여달라고 요청했다. 정작 기겁을 한 것은 천안 군수 조정옥이었다. 천안 군수 조정옥은 권철신의 매부였던 조정기(趙鼎基)와 가까운 친척이었고, 이기성과도 친숙하게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조정옥은 그런 이기성을 달래고 얼른 끝에야 겨우 돌려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실로 이기성의 행동은 당시의 상식에 비추어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해괴한 일이었다.

이같은 정황은 당시 교회 내에서 이존창이 지녔던 위상에 대해 좀더 다르게 생각해야 함을 시사해준다. 이존창의 교계 내부에서의 위치는 분명히 신분을 뛰어넘는 그 어떤 아우라가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송담유록」이 적고 있는 다음 기록이다.

“홍낙민의 외종질인 조 아무개는 참판 조경진(趙景, 1579~1648)의 후예이고 상사(上舍) 조육(趙堉)의 손자였는데, 이존창의 딸을 취해 며느리로 삼았다. 홍낙민이 권유하여 성사되었다. 그들의 학문은 배움의 깊고 얕음을 가지고 높고 낮음의 차례로 삼을 뿐, 문벌의 고하는 따지지 않았으므로 서로 혼인을 통하기에 이르렀다. 사학이 세상의 도리를 그르치는 것이 이에 이르러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홍낙민은 외종질인 조 아무개에게 자기 집 천한 노비 출신인 이존창의 딸을 며느리로 데려갈 것을 권유해, 이 일을 밀어붙여 성사시켰다. 노비 집안의 딸이 명문 대갓집의 며느리로 들어간 것도 놀라운데, 그것을 지체 높은 양반인 홍낙민이 나서서 주선했고, 그의 외종질이 이를 수락했다는 사실도 더 놀랍다. 조 아무개 또한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분의 벽을 허물고, 말씀으로 하나가 되는 교회 공동체의 꿈이 위태롭게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전에 그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한 평등한 세상을 복음을 통해 열고자 했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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