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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 정광수의 성물 공방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21-01-06 09:17:39 | 조회 : 45
가톨릭평화신문 2020.12.25 발행 [1594호]



대궐 옆 동네 벽동에 집회소 만들어 미사 봉헌하고 성물 보급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2. 정광수의 성물 공방



「청구요람」에 실린 벽동 지도. 경복궁과 안국동 사이에 벽동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벽동 본당의 천주교인들

1799년에 상경한 정광수(鄭光受)는 벽동(碧洞)에 자리를 잡았다. 벽동은 오늘날 종로구 송현동과 사간동 일대에 걸쳐 있던 마을이다. 길가인데도 다락처럼 깊숙하게 자리 잡았고, 벽장처럼 길게 끼어 있어서, 벽장골 또는 다락골로도 불렸다. 지금은 공사 중인 송현동 미 대사관 직원 숙소 서쪽과 중학동 북쪽 일대에 해당한다.

대궐과 인접한 이곳은 관리들이 들락거리던 고급 술집과 기생집이 연이어,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던 멋쟁이들이 많았다. 이옥(李鈺, 1760~1812)은 「이언(俚諺)」 연작 중 「염조(艶調)」에서 “외씨 모양 하이얀 버선 신고는, 벽장동에 가지는 말아야겠지. 요즘 유행 따라 하는 침선비(針線婢)에게, 조롱을 당하지 않을 수 있나(白襪瓜子樣, 休踏碧粧洞. 時針線婢, 能不見嘲弄)”라고 썼다. 소박한 외씨 버선을 신고 벽동에 가면, 그 동네의 옷 짓는 여자들에게 뭐 이런 후진 차림새로 이 동네에 들어오느냐고 타박을 받기 쉽다는 얘기다.

대궐 바로 옆 동네인 벽동에 정광수는 별채를 들여, 천주교 집회소를 열었다. 그는 천주교 신도들에게 돈을 모금하고, 가까운 이들의 도움을 받아 벽동 집을 마련했다. 「사학징의」에 보면 강완숙의 아들 홍필주가 충훈부(忠勳府) 후동(後洞), 즉 안국동에 집회 공간을 마련할 때도 김계완, 황사영, 이취안, 김이우 등이 각각 100 냥씩을 염출해서 마련했다고 되어 있다. 요즘으로 치면 새로 본당 하나를 연 것과 같은 개념이었다. 「사학징의」 중 윤점혜의 공초에 따르면, 이곳에서 이들은 “매달 첨례와 송경(誦經)을 6, 7차례 또는 10여 차례씩 행하였고, 첨례날에는 각처에서 모임을 갖고, 남녀가 섞인 채 강학하였다.”

벽동 집회소는 최해두와 조섭의 집을 양옆에 두고 있었다. 최해두는 윤유일의 숙부인 윤현(尹鉉)의 둘째 사위였고, 여주 사람으로 순교한 최창주의 조카였다. 조섭 예로니모는 조도애(趙桃愛)의 오라비로 정광수를 도와 주문모 신부를 모셔와 함께 천주교를 공부하고 미사를 드렸던 인물이다. 벽동에는 이 세 집 말고도 천주교 신자들이 널려 있었다.

정광수의 집이 있던 곳의 통수(統首)였던 최경문(崔慶門)도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정광수의 집에 사서(邪書)를 은닉해두었다가 1801년 3월 19일에 검거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다. 윤유일의 숙부 윤현과 임조이(任召史) 내외도 정광수의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안국동에 옮겨 와서 살고 있었다. 광주(廣州)에서 올라온 심낙훈(沈樂薰)도 그 집에 임시로 머물렀다. 윤현의 셋째 딸이 심낙훈의 아들과 혼인했다. 그러니까 윤현과 심낙훈은 사돈 간이었다. 심낙훈의 여동생 심아기도 동정녀로 신앙을 지키다가 포도청에서 맞아 죽었다. 똘똘 뭉쳐 안팎으로 온 집안이 천주교 신자였다.

이렇게 보면 정광수가 굳이 벽동에다 집회소를 마련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장소를 정할 때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있던 홍필주가 입지 조건의 타당성을 살피러 왔던 것만 보더라도, 당시 교회 본부의 지시에 따른 큰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주변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고 있었고, 동네에 술집과 기생집이 많아 뜨내기 길손이 많았다. 이런 점도 천주교인들의 빈번한 왕래가 바깥사람의 특별히 이목을 끌지 않을 수 있어 유리했다.




▲ 복자 정광수·윤운혜 부부 초상화. 오동희 화백 작.


김치 가게 여주인 최조이

「사학징의」에 당시 필동에 살며 장과 김치를 담가 술집과 기생집에 판매하던 최조이란 노파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의 가게로 정광수 집 어린 계집종이 자주 와서 장과 김치를 사갔다. 첨례일에는 밤을 새워 기도했으므로 함께 식사를 해야 했고, 따로 음식을 마련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단골이 되어 안면이 익었다. 겨울이 되자 계집종이 값비싼 면화솜 뭉치를 선물이라며 주고 갔다. 그녀는 고맙고 미안해서 답례로 자신이 담근 장과 김치를 보내주었다. 그러자 계집종이 자기 주인 마님이 한번 보자신다는 전갈을 전했다.

최조이는 여종 합덕(合德)과 같이 정광수의 집을 찾았다. 그녀는 평소의 입버릇대로 “나무아미타불! 솜도 주시고, 쇤네를 이렇게 불러주시기까지 하시니, 고맙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정광수의 처 윤운혜(尹雲惠) 루치아가 질색하며 급히 말을 제지했다.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 죽어 지옥에 갑니다. 외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더니 윤운혜는 최조이에게 사학의 십계명을 가르쳐 주며 말했다. “이것을 외우면 죽은 뒤에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답니다.”

이후로도 최조이는 윤운혜에게 자주 들렀고, 그때마다 윤운혜는 환대와 함께 그녀가 십계명을 외웠는지 점검하곤 했다. 하지만 최조이는 나이가 많아 번번이 십계명을 외우지 못했다. 윤운혜는 그녀를 답답해 하며 말했다. “고기를 안 먹는다면 정신이 절로 맑아져서, 십계명을 외울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최조이가 집에 돌아가 밥상에 오른 소고기에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 그녀의 딸이 이상하게 여겨 연유를 물었고, 윤운혜가 한 말을 들려주자 그녀의 딸이 펄쩍 뛰면서 다시는 그 집에 가지 못하게 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천주교인들이 주변에 전도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단골이 되어 가까워 지면 선물과 호의로 상대의 환심을 사서 이쪽에 대해 경계를 풀게 한 뒤에, 십계명만 외우면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로 그들을 끌어들였다. 복잡할 것도 없었다. 그저 입에 붙어있던 나무아미타불 대신에 십계만 외우면 집안이 복을 받고, 자식들이 잘되며, 죽어서 천당에 간다는데, 못할 게 없었다. 게다가 한번 그 무리에 들기만 하면 무슨 일이건 서로를 위하고 성심껏 도와주었다. 신분이 낮다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다. 고기를 못 먹게 하면서까지 십계를 외우게 하려 한 것은 그것이 세례를 받기 위한 기본 조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1801년 3월 26일, 최조이는 딸 성조이와 함께 포도청에 붙들려 왔다. 공초에서 성조이는 소고기 사건 이후 어머니를 그 집에 다시는 가지 못하게 했다고 진술하였고, 최조이의 순실(淳實)한 태도에 거짓일 리 없다고 믿은 심문관의 판단에 따라 모녀는 과연 석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윤운혜 집 여종은 포도청에 끌려가서, 두 모녀가 모두 세례를 받아, 성조이는 본명이 마르타(馬達), 최조이는 본명이 이사벨(二四發)이었다고 증언하였다.



성물 제조 공방

정광수의 벽동 집은 당시 서울 지역에 공급할 교리서와 성물, 성화 등을 제작하는 성물 제작 및 판매소이기도 했다. 검거가 시작되자, 정광수는 자기 집에 보관되어 있던 각종 서적과 성물들을 황급히 안국동 윤현의 집으로 옮겼다. 하지만 포도청의 정보망이 한발 더 빨랐다. 윤현의 집 구들장을 들어내자 그 안에서 천주교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정광수의 일기장도 있었다. 일기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누구 누구의 집에 왕래한 내용과 포교 대상으로 삼은 남녀의 동향에 관한 내용까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의금부에서는 이 일기책을 밀봉해서 포도청에 내려보내 이를 근거로 정광수를 취조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붙들려 왔다. 이문동에 살던 송건(宋健)은 그의 아내가 돈을 받고서 교리 서적을 베껴 써준 죄로 부부가 함께 검거되었다. 필사본 자료를 전문적으로 베껴 써주고 사례를 받는 직업 필경사가 있었다는 얘기다. 수요는 폭발하는데 공급이 미치지 못하니 이렇게 해서라도 신자들의 수요를 맞춰주어야 했다.

서울의 여러 집회소 중 성물의 제작과 판매에 관한 기사는 정광수 관련 인물들에게서만 나온다. 그가 성물의 제작과 보급을 전담했다는 의미이다. 서울뿐 아니라 지방의 보급도 중앙에서 맡았던 듯하다. 또 안국동에서 약방을 운영하고 있던 손경윤은 요서(妖書)를 직접 베껴 전해 주거나, 봉전행매(捧錢行賣) 즉 돈을 받고 판매하기까지 했다. 그는 앞서 정광수 집의 도배를 해주었던 인물이다.

「눌암기략」에는 “1797년과 1798년 사이에 사서(邪書)가 크게 행해지자, 책을 빌려주는 자가 큰 이익을 얻었는데, 언문책이 절반을 넘었다고 한다”고 썼다. 도서대여점에서도 비밀리에 천주교 서적을 취급하여 큰돈을 벌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언문으로 풀이한 책이었다고 했다. 실제 신유박해 당시 압수한 「요화사서소화기」에 보이는 서책 목록만 보더라도 한문책보다 언문책이 훨씬 많았다.

「사학징의」 중 윤운혜의 공초에 김흥련(金興連)과 이흥임(李興任) 김경애(金景愛)가 요서(妖書)와 요화(妖畵)를 사갔다고 자백한 내용이 있고, 스스로도 요화 같은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수조행매(手造行賣)’ 즉 직접 제작하여 판매한 일을 자백하기까지 했다. 정광수의 공초에도 요상(妖像)과 요화를 직접 만들어 매매한 사실이 적시되어 있다. 반복적으로 나오는 행매(行賣)란 표현은 돌아다니며 판 것이 아니라, 판매를 했다는 뜻이다.

정광수의 벽동 집에서는 주일마다 신자들이 모여 미사와 송경을 하고, 수시로 교리 공부 모임이 열렸다. 주문모 신부가 직접 미사를 집전할 때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교리서와 성화, 성상 등 성물의 제작도 이곳에서 직접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책의 경우는 전문적으로 필경하는 사람을 고용해, 비용을 주고 책자를 제작게 하여 납품을 받았고, 성화와 성물 등도 직접 만들어 신자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 성당과 그에 딸린 성물 공방과 판매소까지 갖춘 형태였던 셈이다. 성화와 성상에 관한 내용은 따로 소개하겠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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