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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 여사울 신앙 공동체의 출발점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20-07-08 15:00:37 | 조회 : 156
가톨릭평화신문 2020.07.12 발행 [1572호]




홍유한이 뿌린 씨앗, 여사울 100호 중 80여 호에서 신앙의 싹 터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10. 여사울 신앙 공동체의 출발점








▲ 충남 예산군 두촌면 호동리와 천안군 신종면 호동리의 경계선이 그려져 있는 두촌면 청구요람 지도.



여사울은 여우골이다

충남 예산의 여사울은 최초의 수덕자 홍유한(洪儒漢, 1726~1785)이 1757년부터 1775년까지 18년간 살았던 곳이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도 같은 시기에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고, 1801년 신유박해에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순교자가 이어진 초기 천주교 신앙의 못자리다. 김대건, 최양업 두 사제의 출신지도 인근이었다.

여사울 성지의 답사기나 지명 설명에는 으레 여사울이 ‘여(如)서울’ 즉 부유한 기와집이 즐비하여 마치 서울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풀이가 보인다. 내포 평야가 교통의 요지여서 일찍부터 농업과 상업으로 부를 획득한 백성들이 많이 살아 이런 이름을 얻었다는 설명도 늘 따라붙는다.

여사울이 ‘여서울’에서 나왔다는 설명은 터무니 없는 풀이여서 듣기에 딱하고 민망하다. ‘여사’는 여우의 고어인 ‘여’와 고을을 나타내는 ‘골’이 합쳐진 합성어 ‘여골’에서 ‘ㄱ’이 탈락해 ‘여올’이 되고, 이것이 다시 여사울로 굳어진 것이다. 여사울은 여우가 출몰하는 여우골이다. 드넓은 평야지대에 얼마간의 숲이 있어, 여우들이 굴을 짓고 모여살만한 곳이라 이런 이름을 얻었다.

『훈민정음』 해례에 호구(狐裘) 즉 여우 가죽을 ‘여갓’이라 해서, 여우의 원형이 ‘여’임이 입증되고, 이밖에도 『석보상절』을 비롯한 옛 문헌에 많은 용례가 보인다. ‘여’가 지역에 따라 여사, 여시, 여수, 여으, 여우 등으로 음이 변했다. 여사울은 고어의 원형이 지명에 용케 그대로 살아남은 흥미로운 예에 속한다. 이곳의 당시 한자 지명이 바로 여우 호자를 쓰는 ‘호동(狐洞)’인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여사울을 지칭한 다른 표현으로 ‘여호(餘湖)’와 ‘여사동(餘事洞)’, ‘여촌(餘村)이 여러 기록에 더 나타난다. 여호는 그 앞에 무슨 호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여호, 즉 여우를 우아하게 표현한 데 지나지 않고, 여사동 또한 여사울의 음을 취해 전아하게 표기한 것이다. 사실 호동(狐洞), 즉 여우골이란 지명은 당시에는 비교적 흔한 이름이었다. 한 예로 1872년에 작성된 인근 「홍주지도(洪州地圖)」에는 ‘호동’이란 지명이 무려 세 군데나 보인다.



예산 호동리의 인문 지리

호동리의 인문 환경에 대한 설명은 호서관찰사 박종악(朴宗岳, 1735~1795)이 정조에게 올린 보고를 모은 「수기(隨記)」 중 1792년 1월 3일에 올린 글에 특별히 자세하다. “이른바 호동은 1백여 호의 큰 마을로, 두 고을의 땅으로 나뉩니다. 20여 호는 예산 두촌면 호동리이고, 80여 호는 천안 신종면(新宗面) 호동리입니다. 그중에 요사한 술법을 하지 않는 자는 20호 안팎에 불과합니다.(所謂狐洞, 以百餘戶一大村, 分爲兩邑地. 二十餘戶卽禮山豆村面狐洞里也, 八十餘戶卽天安新宗面狐洞里也. 其中不爲妖術者, 無過二十戶內外.)”

그러니까 여사울은 예산군 두촌면과 천안군 신종면으로 행정구역이 갈라진, 하지만 하나의 큰 부락을 이루고 살던 같은 마을이었다. 한 지역의 행정구역이 이렇게 갈라진 것은 이른바 ‘견아상입(犬牙相入)’에 의한 것인데, 고을의 경계가 마치 개의 어금니처럼 서로 엇물리어 들어갔거나, 다른 고을의 경계를 넘어 따로 떨어져 있는 지역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애초에 고을 경계를 획정할 때 각 지방 토호(土豪)들의 이권 관계로 이 같은 현상이 종종 벌어졌다.

글 속의 요술(妖術)이란 말할 것도 없이 천주학을 가리킨다. 위 박종악의 보고서가 놀라운 것은, 홍유한이 이곳을 떠난 17년 뒤인 1792년 당시, 두촌면과 신종면으로 나뉜 여사울 1백호 큰 부락 중에 천주교를 믿지 않는 집은 5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예산 호동리에 믿지 않는 자가 6, 7호, 천안 호동리에는 10여 호 정도의 소수 비신자 집단이 있다고 했다. 이때는 전주에서 진산 사건이 막 일어난 뒤끝이어서 천주교 신자 검거 선풍이 불 때였고, 이존창은 이곳 천주교의 지도자로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청구요람」의 호동리가 표시된 지도에 보면 위 박종악의 기록대로 마을 가운데 점선으로 신종면과 두촌면이 분할된 것이 명확히 보인다. 호적 작성 당시 홍유한과 홍낙교는 예산 두촌면 호동리에 거주했고, 같은 시기 이존창은 천안 신종면 호동리에 살았다. 갈린 것은 행정구역만 그랬고, 실제로는 한 마을이었다.




▲ 홍유한의 여사울 호적단자. 8대 종손 홍기홍 소장.



홍유한 집안의 호적단자

홍유한의 8대 종손 홍기홍 선생 종가에 홍유한의 호동리 호적단자가 남아있다. 호동리 것뿐 아니라 서울 아현동 시절부터 순흥 구고리 것까지 3대에 걸친 14장의 호적단자가 전한다. 동거인의 명부와 노비의 이름과 나이, 숫자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1765년에 작성된 「두촌면(豆村面) 호동리(狐洞里) 을유식(乙酉式) 호적단자(戶籍單子)」에는 홍유한의 집이 두촌면 호동리, 즉 여사울의 8통 3호에 있었다고 호수까지 나온다. 당시 홍유한은 40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 1757년 서울에서 여사울로 내려온 이후 8년째 되던 해였다. 동거인 명부에 나오는 아들 팔희(八喜, 홍낙질의 아명)가 12세였다.

또 같은 해인 1765년에 작성된 홍낙교(洪樂敎, 1740~?)의 호적단자도 남아있다. 그는 당시 26세였다. 주소 역시 예산현 두촌면 호동리다. 한 마을 한 타작마당에서 자란 홍유한의 육촌 형제인 홍양한(洪亮漢)의 맏아들이 홍낙교이니, 홍유한과는 7촌 당질 간이다. 홍낙교의 자는 성육(聖育)인데 권철신과 이기양 등의 편지 속에 아우인 성눌(聖訥) 홍낙민(洪樂敏, 1751~1801)과 함께 자주 등장한다.

이 호적단자 안에 당년 15세의 아우 문인(文寅)이 동거인으로 나온다. 그가 바로 복자 홍낙민(루카)이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복자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 1780~1840)이 그의 아들이다. 부친이 죽자 그는 여사울로 다시 이사해 와서 살았다. 홍낙민의 손자인 홍병주(洪秉周, 베드로, 1798~1840)와 홍영주(洪永周, 바오로, 1801~1840) 형제 또한 순교로 신앙을 증거해 103위 성인품에 오른 분들이다. 홍재영은 또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이고, 아들 홍봉주도 순교했다.



홍유한과 홍낙민

1765년 당시 홍유한과 홍낙교 두 집안은 모두 여사울 한마을에 함께 살고 있었다. 홍낙민은 종손가에 남은 친필 홍유한 제문에서 이렇게 썼다.

“아! 소자가 부족하여 1763년에 아버님(홍양한)께서 세상을 뜨시니, 이때 소자는 성인이 되기 두 해 전이었습니다(13세). 다만 선생께서 사랑으로 길러주시고 정성스레 가르쳐 주시며, 부족하다 아니하시고 장차 성취가 있을 것으로 허락해주셨습니다. 소자가 오늘날 큰 허물을 면하고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선생께서 내려주지 않으신 것이 없습니다. 아! 선생께서 소자를 자식처럼 보아주셨으니, 소자가 어찌 선생을 아버지처럼 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3세 때 부친이 세상을 뜨고, 홍낙민 형제는 한마을에 살던 재당숙 홍유한의 훈도를 받고 자랐다. 애초에 두 집안이 여사울로 이주한 시기도 비슷했다. 이후 1775년 홍유한이 경상도 순흥의 구고리로 이사하자, 홍낙민 또한 이듬해인 1776년에 충주로 거처를 옮겼다. 이 일을 두고 또 홍낙민은 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아! 소자가 호서에 있을 적에 선생과 더불어 한마을에 살면서, 계신 곳에 나아가 배우기를 10년을 하루같이 하였었지요. 1775년에 선생께서 순흥 땅으로 이사하시매, 소자는 충주로 집을 옮겼습니다. 대개 충주는 순흥 땅에서 180리 거리여서 하룻밤만 자면 이를 수 있는지라, 그 가까움을 취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점차 그곳으로 가서 의지할 계획을 꾀했던 것입니다.”

앞서 살핀 권철신 이기양 등이 합류한 공동체 구상 속에 홍낙민 형제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을 하나로 묶어준 고리는 서학이었다. 초기 교회사의 바탕에는 홍유한이 뿌린 씨앗들이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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