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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숨은 이야기 | 란동(lan tong)과 판쿠(fan kou) 인쇄하기
이름 관리자
2020-12-10 16:04:28 | 조회 : 107
가톨릭평화신문 2020.12.13 발행 [1592호]



가성직 신부들이 난동과 반촌에서 미사와 성사를 베풀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30. 란동(lan tong)과 판쿠(fan kou)



▲ 마태오 리치가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관을 쓴 모습. 
동파건(東坡巾)으로 불리던 관이다. 위에서 보면 왼쪽 사진과 같다.



로마 교황청에 남은 이승훈과 유항검의 편지

로마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 중 중국 및 동인도 관계문서(1791~1792) 속에, 1789년 말과 1790년 7월에 북경의 북당 선교사에게 보낸 이승훈의 편지 2통과 그에 앞서 ‘현젠(Hiuen-Chen)’으로 표기된, 유항검으로 추정되는 인물(항검(恒儉)의 중국음이 ‘헝젠 Heng-jian’이다)이 이승훈 등 교회 집행부에 보낸 편지 1통이 프랑스어 번역으로 남아 있다. 한문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모두 윤유일 편에 북경으로 전해진 편지다. 문서 속 한자의 알파벳 표기는 당시 번역자가 광동 지역 방언에 따른 한자음을 자기네 언어로 표기한 것이어서, 정확하게 대응하는 한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승훈은 북당 선교사들에게 보낸 첫 편지에서 유항검 추정 인물이 자신에게 의례에 관해 문제 제기한 편지를 첨부해 6가지 질문을 던졌다. 가장 핵심이 되는 질문은 1786년 가을, 조선 교회에서 미사성제와 견진성사를 거행하기로 결정이 났을 때, 당시 가성직 신부 10명 중 한 사람이 그것이 독성죄(瀆聖罪)에 해당함을 지적했고, 「Cheng kiao Iva yao」라는 책에서 해당 근거를 찾았으니, 이에 대한 유권해석을 청한다는 것이다. 한자음으로 추정할 때 ‘성교입요(聖敎入要)’쯤으로 볼 수 있을 듯하나 이런 책은 없다. 음이 가장 비슷한 「성교절요(聖敎切要)」에는 문제가 된 신품(神品)과 인호(印號)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이 또 문제다.

편지에는 자신을 신부로 뽑은 집행부의 토론과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모임에서 독성죄에 대한 논의가 있었음을 적었다. 또 ‘란동(lan tong)’과 ‘판쿠(fan kou)’에서 열린 모임에서 자신의 의견이 논의조차 되지 않았음을 항의하고,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이 글은 당시 조선 교회의 집행부에 해당하는 가성직 제도 아래 10인의 신부들이 란동과 판쿠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규칙적으로 가졌고, 이 모임에서 교회의 사목 지침이나 의례, 그밖에 주요 결정사항의 의결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란동은 지금의 회현동

이 편지 중에 당시 서울 지역의 집회 공간으로 란동(lan tong)과 판쿠(fan kou)란 두 지명이 나온다. 우선 란동은 난정동(蘭亭洞) 또는 난동(蘭洞)으로 불리던 오늘날 회현동 2가에 있던 공간으로 보인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서울에 사는 최관천 요한이 집 한 채를 세내어 성사를 거행하였다. 그는 매우 활동적이고 몹시 총명하여 신부들을 영접하고 교우들을 준비시키는 등 모든 일을 처리하였다”고 했고,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비망기」에도 “서울에서도 규정에 따라 모임을 가졌다. 우리는 별명이 관천인 최요한이 신부들을 영접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줄 수 있도록 일부러 집 한 채를 세낸 것을 보았다. 그는 활동적이고 유능한 성격으로 신부들을 영접하고 모든 일을 처리하고 교우들을 적절하게 준비시켰고, 귀찮아하거나 피곤함을 마다하지 않고 밤낮으로 신부와 교우들에게 헌신하기에 바빴다”고 적혀 있다.

당시 가장 비중 있는 집회 공간으로 적시된 이 집이 바로 편지 속의 란동이었을 것으로 본다. 글 속의 최관천은 최창현(崔昌顯, 1759~1801)이다. 황사영의 백서에 따르면, 최창현의 집은 지금의 을지로 3, 4가에 해당하는 중구 입정동(笠井洞)에 있었다. 입정동은 갓[笠]을 만드는 곳에 우물이 있어 갓방우물골이라 불린 곳이다. 관천(冠泉)은 관(冠)이 갓이고 천(泉)은 샘이니, 갓우물 즉 입정의 다른 표현이다. 최창현은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난정동에 집 한 채를 세내어서 교인들의 집회 공간으로 제공했던 듯하다.



판쿠는 어디?

유항검이 지목한 또 한 곳은 판쿠다. 이곳은 동반촌(東泮村) 김석태의 집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판쿠는 반구(泮口)로 비정되고, 반촌(泮村) 어귀라는 뜻이다. 지금의 대학로에 해당하는 낙산(駱山) 아래 살았던 이민보(李敏輔, 1720~1799)가 지은 시에, “꽃과 바위 전해오는 반촌 어귀 마을은, 유거(幽居)가 말쑥해서 티끌 어둠 저 너멀세(花石相傳泮口村, 幽居淸隔塵昏)”라고 한 용례가 있다.

이곳은 1787년 당시 이미 이승훈과 정약용이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성균관의 유생들을 불러모아 천주교 강학을 진행했던 공간이다. 난동을 최창현이 맡아 운영했다면, 반촌 쪽은 김석태가 같은 역할을 맡았던 셈이다. 앞서 보았듯 정약용이 쓴 제문에 나오는 김석태는 대단히 열성적으로 당시 가성직 제도하의 신부였던 이승훈과 정약용 등을 보좌했던 인물이었다.

이곳 교회는 정미반회 사건 이후로도 같은 곳이거나 혹 인근의 다른 장소를 옮겨서 운영되었던 듯하다. 다음 「벽위편」의 대목이 음미할만하다.

“1800년 6월에 주상께서 승하하시자, 옥사가 마침내 풀렸다. 새 주상이 나이가 어려 정순대비께서 반년 간 수렴청정하시니, 다시 신칙하여 금지함이 없었다. 사학의 무리가 아무 거리낄 것이 없게 되자, 가을과 겨울 이후로는 배나 성하게 되었다. 곳곳에서 설법하여, 심지어 부녀자들이 새벽과 밤에 등불을 밝혀 거리를 왕래하며 끊이잖고 잇달았다. 섣달이 되었을 때는 성균관의 제생들이 밤중에 집으로 돌아갈 때 거의 어깨가 맞닿을 지경까지 갔다. 나졸들이 이를 괴이하게 보아, 전날에 한 번도 보지 못한 일로 여겼다. 1801년에 옥사가 일어나자 왕래가 마침내 끊기니, 그제서야 그들이 사학의 무리인 줄을 알았다.”

정조 승하 후 국상(國喪) 기간 동안 모든 옥사가 중단된 틈을 타서, 천주교 신자들이 반년 간 아무 거리낌 없이 천주교 집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들은 밤중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졌다. 교세가 폭발적으로 확장됨에 따라 집회 장소도 여러 곳으로 확장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밤에 귀가할 때, 부녀자들이 등불을 밝히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서로 어깨를 닿을 정도여서 해괴하게 생각했는데, 신유박해 이후 종적이 완전히 끊긴 뒤에야 그들이 모두 천주교 신자였음을 알았다는 내용이다. 굳이 성균관 유생의 이야기를 넣은 것은 당시까지 여전히 반촌 일대에서 집회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1800년 12월 19일에는 형조의 나졸들이 장흥동(長興洞) 어귀를 지나다가 집안에서 나는 박자 치는 소리를 들었다. 투전판이 벌어진 것으로 판단해 창문으로 뛰어드니, 방안 풍경이 몹시 기괴했다. 사람들이 다소곳이 빙 둘러앉아 있었고, 그들이 손으로 가슴을 치면서 내는 소리였다. 몸을 수색하자 여러 사람의 몸에서 점례단자(占禮單子), 즉 축일표가 나왔다. 그것을 들고 형조로 돌아간 그들이 뒤늦게 물건의 실체를 알고 다시 집회 장소로 달려왔다. 하지만 모였던 사람들은 그 사이에 다 달아났고, 최필공의 종제(從弟) 최필제(崔必悌)와 오현달(吳顯達) 스테파노가 붙잡혀 왔다. 이후 최창현 등 교계의 중심인물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오면서 좌우 포도청의 감옥이 천주교인으로 가득 찼다. 신유박해의 서막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난동과 판쿠, 이 두 곳은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헤드 쿼터였다. 이곳에서 교리서 보급과 의례절차 등 교회의 모든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신부의 역할을 정하고, 미사 경본을 조정하며, 미사와 성사를 행하는 주요 활동이 이뤄진 공간이기도 했다.



미사와 고해성사

이승훈의 1차 편지에서 북경에 올린 6가지 문목 중 다섯 번째는 고해성사의 적법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1786년 봄, 이들은 신자 상호 간에 고해하는 방법을 논의했다. 그 결과 갑은 을과 병에게 고해를 하되, 갑과 을 또는 을과 병은 서로 고해하지 못하게 하는 교차 고해의 방식을 채택했다. 1786년 가을에는 가성직제도에 따른 10인의 신부가 임명되었고, 미사성제와 견진성사 거행의 권한이 부여되었다.

당시의 미사 전례는 「시과경(時課經)」, 즉 「성무일도(聖務日禱)」 외에 미사경본을 형편에 맞게 첨삭한 형태를 채택했던 듯하다. 정미반회 때도 「조만과경」을 외운 이야기가 보인다. 당시 신부는 중국 비단으로 만든 제의를 입었고, 중국의 서양 신부들이 쓰던 모자와 비슷한 관을 만들어 썼다. 「미사제의(彌撒祭義)」에 나오는 상방하원(上方下圓), 즉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모양의 제건(祭巾)이었을 것이다. 고해 성사 때 신부들은 단 위 높은 의자에 앉았고, 고백자는 그 앞에 서서 죄를 고백했다. 보속은 대부분 희사였고, 죄가 중할 경우 신부가 회초리로 죄인의 종아리를 치기도 했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신부들의 가장 큰 고충은 지체 있는 부인들의 고해성사 요청이었다. 남녀가 유별한 터에 여인네들의 죄 고백을 면대하고 듣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들이 너무도 졸랐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해는 이를 원하는 신자들이 신부가 있는 곳을 찾아와 성사를 요청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고해를 마친 이들은 마음의 무거운 짐을 비로소 내려놓은 개운한 표정이 되어 기쁘게 돌아갔다.

서울을 비롯해 양근, 여주, 이천, 충주, 내포, 전주 등지에서 조직과 공간을 마련하고 신부의 활동이 본격화되자 전국적으로 신자의 숫자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정민 베르나르도(한양대 국문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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