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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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문화나 종교를 이단으로 여겨 오랫동안 배척해 오고 있었고, 따라서 천주교회의 창설은 곧 박해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국 천주교회는 창설 초기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고, 첫 번째 박해(1791년)에서부터 네 번째 박해(1801년)에 이르는 동안 이미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크고 작은 박해가 일어남으로써 순교의 행렬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비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박해자의 눈을 피해 가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밀사를 중국으로 파견하여 그곳 선교사들과 연락을 취했고,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으며, 더 나아가 교황청에까지 서한을 보내 한국 천주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1831년 9월 9일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 성하에 의해 마침내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탄생과 성장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양업은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부친을 따라다니다가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에 있는 수리산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수리산 마을은 그 후 신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비밀 신앙 공동체로 변모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 대목구의 전교를 위임받은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파견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 감시가 심한데다가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서양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는 프랑스 출신의 성 모방 베드로 신부였다.
1835년 말, 한국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입국한 모방 신부는 즉시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기 시작하였고, 다음해 초에는 부평에 있는 최경환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최양업 소년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5살이었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은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어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마카오 유학과 부제 서품

최양업은 1836년 12월 3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성서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하고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다음해 6월 7일에는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카오에서의 유학 생활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837년 11월에는 동료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말에는 마카오로 돌아오게 되었다.

최양업은 아직 공부가 끝나기도 전인 1842년 4월에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한국과의 통상 조약을 원하는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한국 천주교회와의 연락을 기대하고 최양업과 김대건을 각각 다른 프랑스 함대에 승선토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남경에 도착한 후 더 이상의 북진을 원하지 않게 되자 최양업과 김대건은 프랑스 함대에서 내려 요동으로 가게 되었다. 한국으로의 입국로 탐색을 위해서였다.
이후 최양업은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eol) 요한 주교로부터 계속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성모성심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중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신학 수업을 계속하던 최양업은 1844년 12월 10일경, 동료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부제가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제 서품과 귀국

귀국로를 탐색하는 동안 최양업 부제는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1846년의 박해와 동료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조국에서의 애통한 소식에 대해 알렸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며 변문(한중 국경의 성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서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한 최양업 부제는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 도착한 뒤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귀국로 탐색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847년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한국 해안에 도달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장가루(혹은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때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였다.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는 그 해 5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1월에는 매스트르 신부를 다시 만나 귀국을 시도한 끝에, 12월 3일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매스트르 신부는 발각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였다.

사목 활동과 선종

귀국 즉시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 5천 여 리를 걸어다니며 신자 3,815명을 방문하였다. 이후 진천 배티를 사목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이후 11년 6개월 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 및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중에 최 신부는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1859년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고,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쌓인 밤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신앙과 조국애, 신자들에 대한 애정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어진 채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한국 천주교회를 부탁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으신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신부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다 마친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걸려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최양업 신부의 신심과 열심, 평소에 보여 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 신부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후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e)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가 배론 신학교에서 170-180리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학교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시 그는 최 신부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열성적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 최 신부의 선종 후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성대하게 장례가 치루어졌고 그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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