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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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1984년에 시성된 103위 성인에 관한 시성 과정이고, 둘째는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이다. 이러한 과정을 살펴보면서 현재 진행되는 시복 조사의 의미를 깨닫고 그분들의 신앙과 영성을 본받는 것이 후손의 도리일 것이다.

I. 103위 성인의 시성 추진

1.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 시복

1) 자료 및 예비 조사의 시작 : 1839년의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조사는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1838년 말에 몇몇 신자들이 체포되자 그에 대한 박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시작되었다. 1847년 페레올 고 주교는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포함한 프랑스어본 “증보판 기해일기”를 완성하여 홍콩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냈다. 1847년에 최양업 토마스 부제는 이 기록을 라틴어로 번역하는데, 이것이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다. 이 행적은 1847년 10월 15일 교황청 예부성성(현 시성성)에 제출되어 시복 소송절차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2) 시복 과정 : 1857년 9월 24일 교황 비오 9세의 윤허를 받아 예부성성은 “Positio super Introductitione causae"를 발표한다. 이로써 82명의 순교자는 ‘가경자’가 되었으며 교황청 수속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번의 조사와 검증과정을 거친 후 1905년 7월 26일 예부성성에 “기해*병오박해 시복 조사 수속록”을 제출하였다. 교황청에서는 1921년부터 1925년까지 관계자 회의를 마무리하여 그해 7월 5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79위 순교자들이 시복되었다.

2.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

1) 자료 및 예비조사는 1876년부터 시작되었으며 1880년 뮈텔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뒤부터 활기를 띠게 되었다. 1884년 뮈텔 신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자료 및 예비조사 작업이 시작되었다. 1890년 뮈텔 신부가 제8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되어 다시 한국에 입국하자 예비조사 작업이 본격화되었으며 1895년에 르 장드르 신부에 의해 877명의 순교자 전기가 “치명일기”로 간행되었다.
2) 시복 과정 : 교구 시복 재판은 1899년에 열렸는데, 위임판사는 르 장드르 신부, 청원인은 한기근 바오로 신부, 서기는 홍병철 루가 부제가 맡게 되었다. 6월 19일부터 진행된 증인 심문은 다음해 11월 30일까지 100명의 증인이 135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1921년 2월 12일부터 1926년 3월 18일까지 129회에 걸쳐 85명의 증인들을 대상으로 교황청 재판이 열렸으며 시복 판사는 드브레 보좌주교가 맡았다. 이 과정에서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과 “병인박해 치명사적”이 자료집으로 정리되었다. 교황청 재판 기록은 모두 8권으로 묶어 교황청으로 발송되었으며, 1952년 3월 2일에 그 유효성을 인정받았다. 연이은 교황청 시복 관계자 회의를 거쳐 1968년 10월 6일 로마 베드로 성전에서 24위 시복식이 거행되었다.

3. 한국 순교 복자 103위 시성

103위의 시성 안건은 1971년 12월에 열린 주교회의에서 다루어졌고, 1975년 9월 전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에서는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과 103위 복자의 시성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1976년 4월에 열린 주교회의 춘계 정기 총회에서는 103위 복자들의 시성 청원서를 교황청에 제출하고 담당주교에 김남수 안젤로 주교를 선출하였다. 1977년 10월 로마 유학 중인 박준영 루도비코 신부를 로마 주재 법정 대리인으로 임명하였고 1978년 4월 13일 한국 복자 103위의 시성 건이 교황청에 정식 접수되었다. 이 안건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입안되어 변기영 베드로 신부가 실무자, 윤민구 신부가 청원인이 되었다. 1982년 11월 19일 로마의 추기경 회의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은 200주년 기념행사에 교황을 초청하였으며 그에 대한 확답을 들었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의 시성 추진 관계자들은 1984년에 한국 순교자들의 시성식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1983년 3월 24일 한국 주교단의 명의로 ‘기적 관면 청원서’를 작성하여 교황청에 제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3년 9월 27일의 특별회의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03위의 시성을 승인?선포하였고, 드디어 1984년 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시성식이 집전되었다.

II.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을 중심으로 한 시복 추진

1.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시복 추진 노력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는 1982년 9월 9일에 제1차 시복 시성 추진위원회를 열고 초기 순교자의 시복 시성 추진 사업을 논의하기 시작하였었다. 그러나 103위 시성 추진과 상충될 소지가 있어 일시 중단되었다가, 시성식 직후 1984년 6월 24일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인 광암 이벽 요한세자와 그 동료 순교자 및 증거자들”이라는 제목으로 98위 순교자 시복 추진 심사 선언이 200주년 기념 사업위원회 위원장 김남수 주교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한 주교회의에서는 시복 추진을 해당 교구별로 분리하여 추진키로 함에 따라, 1985년부터 수원교구는 창설 주역 5위 순교자 시복에 전념하나 1988년 103위 성인 신심의 위축을 이유로 보류하게 되었다. 전구교구는 첫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4위 순교자 시복에 치중하였다. 그 결과, 전주교구는 1989년 4월 12자 공문을 통해 “장애 없음”을 통보받았다. 수원교구에서는 1996년 “윤유일 바오로외 동료 7위”의 순교자 시복이 추진되어 그 해 10월 24일자 공문을 통해 “교령과 장애 없음”을 얻게 되었다.

2. 주교회의 차원의 시복 통합 추진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 총회에서 “한국 순교자 시복 시성 통합 추진”이 결정되었고, 1998년 10월 12일 주교회의 상임위원회는 각 교구 담당 신부들이 모여 “시복 시성 통합 추진 회의”를 추진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1999년 1월에 첫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2000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 총회의 ‘시복 시성 추진 교구들의 교구장 주교 연석회의’에서 청구인에 “김종수(요한) 신부”, 청원인에 “류한영(베드로) 신부”를 임명하였고, 2001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 총회에서 시복 시성 추진 담당 교구장 주교에 “박정일(미카엘) 주교”를 선출하였다. 또한 2001년 3월 22일 주교회의 춘계 정기 총회 결정대로 “통합 추진에 있어서 ‘주교회의가 청구인’이 되며 그 추진에 따른 권한을 마산교구장 박정일(미카엘) 주교에게 이행한다는 사실”에 대해 서면 동의하고 선언하였음을 2001년 6월 9일자 공문(Prot. No. 108/2001)을 통해 시성성에 알렸다.
2001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 총회에서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2002년 9월 2일 제3차 회의에서는 전국 공용 “시복 시성 기도문”을 제정하였다. 이 후 지속적인 통합 추진 노력 끝에 2002년 9월 4일 시성성으로부터 하느님의 종 “윤지충과 동료 123위”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건이 단일 안건으로 받아들여지고 마산교구장에 그 관할권이 부여되었음(Prot. N. 1664-2/01)을 통보받았다. 또한 2003년 10월 6일 하느님의 종 “윤지충과 동료 123위”의 시복 심사에 대해 시성성으로부터 아무 “장애없음”을 통보받았다(Prot. N. 1664-1/89). 2003년 11월 20일 역사전문가 위원회가 구성되어 중앙협의회 소회의실에서 첫 모임을 가졌으며, 여러 차례 모여 시복 대상 순교자에 대한 추가 조사와 연구 작업을 하였다.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시복 재판은 2004년 7월 5일 법정이 개정되었다. 이후의 과정은 증인들에 대한 소환 조사, 문서 증거 제출, 공적 경배가 없음을 조사하는 현장방문, 소송 기록물 공표, 보충 증거 제출, 번역문서 제출, 사본 작성과 문서 대조, 법정 종료이다. 법정은 총 36회기로 2009년 5월 20일에 폐정되었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회 차원의 시복시성 조사가 완료되었다. 현재 이 시복 조사 문서들은 2009년 6월 3일에 시성성에 정식 접수되어 그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III.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의 신앙과 영성

현재 시복이 진행되고 있는 하느님의 종들 중에 신유박해(1801)에 순교하신 분들은 53위이다. 신해박해(1791)와 을묘박해(1795), 정사박해(1797)로 순교하신 분들은 14위이고 신유박해 이후 정해박해(1827)까지의 순교자들은 17위이다. 따라서 124위 순교자들 중 3분 2가 신유박해 전후의 순교자들이다. 이러한 순교자들이 시복된다는 것은 선교사 없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실천한 선조들의 삶과 사제로서 첫 번째 순교자인 주문모 신부님의 삶을 본받는다는 의미가 크다.
124위 순교자들은 신앙의 본질과 전형을 보여주시는 분들이며 십자가와 부활의 영성을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준다.
- 순교자들은 부활의 신앙을 증거한 분들이다.
- 순교자들은 십자가의 희생제사에 전적으로 일치하신 분들이다.
- 순교자들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다.
- 순교자들은 초월적인 신앙을 보여주신 분들이다.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은 단순히 성인의 숫자를 늘리는 과정이 아니다. 우리가 그분들의 삶을 본받고 따르는데 있다. 그분들이 받으신 순교의 은총과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을 발견하고 찬미하는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순교자에 대한 연구와 홍보가 필요하며 시복 과정을 통하여 이러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시복의 과정들은 전혀 없는 것들을 새로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과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순교자들에 대한 홍보는 순교 직후에 있었던 평판과 하느님의 은총을 재발견하고 영적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순교자들의 시복 과정은 우리가 현재 받은 신앙의 은총에 대한 감사의 행위이다. 시복 조사와 과정을 통하여 우리들은 선조들이 피를 흘려 전해준 신앙의 의미와 본질을 새롭게 깨닫고 우리의 신앙을 쇄신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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